한국일보

방학맞은 아이들과 신선한 ‘예술체험’

2002-12-20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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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카운티 뮤지엄 어린이 워킹투어 ‘인사이드 아웃’

세월 정말 빠르다. 어느새 연말 연시. 성탄과 세모를 맞아 한 치의 여유도 없을 만큼 마음이 분주할 테지만 겨울 방학을 맞은 자녀들과 의미 깊은 시간 하나 마련하지 못한다면 부모 된 도리가 아닐 것이다. 백덕현(38·무역업), 은경(39·은행원)씨는 맞벌이 부부. 평소에도 자녀들과 충분히 시간을 보내지 못해 항상 죄스런 마음을 안고 살던 이들 부부는 지난 주말 승혜, 승연, 승우 세 남매와 함께 LA카운티 뮤지엄(LACMA)으로 나들이를 떠났다.

올해 두 살 난 승우야 집에서 크레파스로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추상화를 그리는 것이 고작이지만 큰딸 승혜(10)는 벌써 4년째 미술 지도를 받아 기초 과정을 마치고 아크릴 화를 배우고 있는 예비 화가. 승연(6)이 역시 파스텔화와 수채화를 배우며 언니의 뒤를 바짝 쫓고 있다.


평소 자주 찾던 뮤지엄일지라도 어린이를 위한 워킹 투어 ‘인사이드 아웃(Inside Out)’ 프로그램을 따라 다닌 오늘의 방문은 아주 특별했다.
뮤지엄에 오면 그 많은 작품들을 하루에 다 보겠다는 욕심으로 문을 나설 때엔 도대체 무엇을 봤는지 혼동되기가 십상이다. 인사이드 아웃 프로그램은 이런 욕심을 내려놓고 어린이들이 궁금증을 갖고 감상할 수 있을 만한 대표적 작품 6개를 선택한다.

조각, 회화, 건물과 함께 하는 놀이를 통해 다양한 시각으로 바라보고 느끼는 예술적 체험은 신선함으로 가득하다.
시작은 야외의 모빌 조각. 정문 오른쪽의 디렉터스 라운드테이블 가든(Director’s Roundtable Garden)에는 분수가 뿜어 오르는 가운데 검정, 파랑, 흰색에 노랑과 빨강의 액센트가 더해진 대형 모빌이 나타난다. 바람 따라 돌아가면서 항상 변하는 이미지를 창조하는 이 작품에는 율동과 리듬이 있다. 안내 책자에 나온 대로 백덕현씨는 가족을 안내하는 큐레이터가 된다.

“모빌은 바람 따라 다르게 보이는 조각이야. 바람이 불면 변하는 것들은 또 뭐가 있을까?” “음. 깃발, 연, 머리카락.” 총명한 승연이가 세 가지나 답을 한다. “바람이 몹시 부는 날 이 조각에 매달려 있다고 상상을 해봐. 어떻게 움직일 것 같아?” 승혜와 승연이는 조각의 형태처럼 한 발로 서서 팔을 양쪽으로 벌리며 균형을 잡으려 애쓴다.
조각가 캘더는 이 작품에 ‘Hello Girls’라는 제목을 붙였다. 그렇고 보니 모빌이 움직이면서 만드는 이미지가 소녀들이 손을 흔드는 모습 같아 보인다.

두 번째 작품 역시 야외의 조각이다. 사각형과 원, 삼각형과 곡선 등 다양한 형태들이 뒤섞인 화려한 색깔의 이 작품은 꼭 나무의 형상을 닮았다. “어떤 나무를 닮았을까?” 하는 질문에 승혜는 소나무라 대답하고 승연이는 야자수와 닮았다고 응답한다. 같은 작품도 어디서 보느냐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법이다.

조각가 낸시 그레이브스는 “만약 당신이 번쩍거리는 철과 동만을 발견했다면 조금 거리를 두고 작품을 볼 필요성이 있다.”고 말했다. 나무만 보되 숲을 보지 못하는 오류에 대한 깨달음은 이 작은 예술 작품 감상을 통해서도 얻을 수 있었다.

세 번째 감상 작품은 일본 예술 별관(Pavilion for Japanese Art). 건물 자체가 멋스러운 예술 작품이다.

네 번째 작품은 일본 예술 별관 꼭대기에 진열돼 있는 사무라이의 갑옷과 무기. “아빠 모자에 왜 사슴 뼈가 달렸어?” 승혜의 날카로운 질문이다. “아주 오래 전 사람들은 전쟁터에 나갈 때 투구에 뼈를 단 동물의 혼이 그들을 지켜줄 것으로 믿었단다.” “옷도 예술이야?” “그럼. 지금 승연이가 입은 옷이 이 다음에 뮤지엄에 전시될 수 있을까?” 승연이는 도리질이다.


일본 예술 별관을 나와 정문을 가로질러 보석과 같은 영구 소장품들이 전시돼 있는 아만슨 빌딩으로 향한다. 이날 감상해야 할 다섯 번째 작품, 매리 카사트의 유화가 걸려 있는 방은 1층 109호실. 아기를 안고 있는 엄마의 그림이 평화로워 보인다.

백은경씨도 승우를 팔에 안고 그림을 감상한다. 아가와 엄마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끈으로 연결된 사이. 둘의 이미지를 통해 변하지 않는 모성애라는 추상명사를 효과적으로 전달한 화가의 솜씨가 경이롭다. 여섯 번째 그림은 바로 옆방 108호실에 있는 리온 크롤의 회화다.
고작 6개의 작품을 감상한 것뿐인데 밖으로 나오니 벌써 땅거미가 져 어둑하다. “아빠, 재밌다. 또 오자.” 두 딸들은 오늘의 방문이 아주 만족스러웠던 모양이다.

다음 번에는 LACMA의 소장 작품 가운데 몇 가지를 선택해 연구한 뒤 방문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백덕현씨는 기분 좋은 부담감을 가슴에 안는다. 스스로가 디자인 한 ‘인사이드 아웃’ 프로그램으로 온 가족이 함께 예술 작품을 감상할 때 자녀들은 훗날 얼마나 풍성한 기억들을 간직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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