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지평선] 사기당한 엄흥도 가문과 실력 본위

2026-03-24 (화) 12:00:00 조철환 오피니언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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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 사는 남자’의 엄흥도(嚴興道·유해진 분) 가문은 단종 사후 200년이 흐른 현종과 숙종 때 복권돼 ‘충절 가문’으로 되살아난다. 그러나 야심 많은 노비의 신분 세탁 통로가 된다. 엄흥도 자손들이 강원도, 경상도 일원으로 흩어져 숨어 지내며 출세한 인물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틈을 노려, 노비 이만강(李萬江)이 엄흥도의 후손 엄택주(嚴宅周)를 사칭한다. 엄택주가 된 이만강은 과거 급제 후 연일현감으로 선정을 베풀어 존경을 받았지만, 숙종의 아들 영조 때 신분 사칭이 들통났다.

무수리 출신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영조. 그는 ‘엄택주’를 용서했을까. 조선왕조실록(영조 21년 5월 26일)에 영조의 추상같은 하교가 나온다. “엄택주의 일은 윤상(倫常)의 문제이다. (중략) 죽여도 아깝지 않다고 할 만하니 (중략) 형조에서 세 차례 엄히 처벌한 후, 흑산도로 유배하여 영원히 노비로 삼고, 대과·소과 방목에서 그 이름을 삭제하도록 하라.” 이만강은 영조 31년 벽서 사건에 연루돼 곤장을 맞다가 숨진다.


영조의 처분에서 보듯, 조선은 ‘실력 본위’ 사회가 아니었다. 지금은 어떨까. 조선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지만, 실력보다 신분이 앞서는 경우는 여전하다. 당장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실력과 연봉의 괴리가 확인된 국내 프로야구가 대표적이다.

여자 농구(2025년)도 에이스급 연봉(4억5,000만 원 선)이 미국여자프로농구(WNBA) 최고 연봉(약 3억5,000만 원)보다 많다고 한다. 국내 선수 보호를 명분으로 외국인 제한이 이뤄진 탓이다.

스포츠보다 실력 본위가 요구되는 분야가 경영·경제다. 성장의 원동력으로 ‘창조적 파괴’(조지프 슘페터), ‘기업가의 야수적 충동’(존 케인스)이 강조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혁신성과 기술력이 떨어지거나, 시장 기준을 맞추지 못하면 안타깝지만 도태돼야 한다.

그러나 다양한 방법으로 비효율 구조가 연명되고, 당국의 기준 없는 온정주의적 시장 개입도 계속된다. 비효율을 알면서도 당장의 편안함 때문에 여론도 반긴다. 누적된 비효율을 미래 세대가 감당해야 하는 걸 알면서도.

<조철환 오피니언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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