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모세와 유일신론’, 그리고 아크나텐

2026-03-24 (화) 12:00:00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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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초기 종교는 다신교였을 가능성이 높다. 자연 현상을 물리학 법칙으로 설명할 능력이 없던 옛사람들은 보이는 사물을 신격화해 이해하고 달래는 방식을 택했다. 갑자기 천둥 번개가 치고 비가 오면 ‘하늘이 노했다’고 하고 가뭄이 들어 곡식이 타들어가면 기우제를 지내 하늘의 분노를 달래는 방식이 그것이다.

일본에는 지금도 시내와 계곡, 언덕마다 신령이 깃들어 있고 그 숫자는 800만에 달한다고 한다. 엄청나게 많은 것 같지만 인도에 비하면 약과다. 인도 신화에는 3억3천만명의 신이 존재한다. 하긴 일본보다 땅도넓고 인구도 많으니 그럴만 하다.

세계에서 유일신이란 개념을 처음 신봉한 것은 유대교다. 전통적으로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유일신을 믿은 것으로 돼 있지만 학자들의 생각은 좀 다르다. 창세기부터 성경 곳곳에 신이 자신을 칭하면서 “우리”라는 표현을 쓴 부분이 나온다.


전문가들은 아브라함의 생각은 ‘유일신론’(monotheism)이라기보다는 ‘다른 신보다 한 신을 우위에 두는 ‘일신 우선론’(henotheism)에 가깝다고 본다. 그리고 유대교가 지금 같은 유일신교가 된 것은 기원전 6세기 신바빌로니아에 망해 바빌론으로 끌려갔다 페르샤에 의해 해방돼 돌아온 다음부터라고 한다.

그리고 그렇게 된 것은 페르샤의 국교인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이 크다. 자라투스트라(조로아스터는 그리스식 이름)가 세운 이 종교는 세계를 선신 아후라 마즈다와 악신 아리만의 각축장으로 보고 결국 세상의 종말이 오며 이때 최후의 심판을 거쳐 선인은 천국에, 악인은 지옥에 가는 것으로 돼 있는데 이는 훗날 기독교와 회교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최초로 유일신을 신봉한 것은 유대인도 페르샤인도 아니고 이집트인이란 주장을 편 사람이 있다. 심리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다. 그는 1939년 펴낸 ‘모세와 유일신론’이란 책에서 모세는 원래 히브리 노예 출신이 아니라 이집트인으로 파라오 아크나텐의 사제였으며 그의 사후 외부로 도망쳤다 새로운 종교를 창시했으나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 살해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를 살해한 자들은 훗날 참회하고 그를 숭배하며 메시아란 개념도 그가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생겨났다는 것이다. 모든 종교의 배후에는 신자들의 원죄 의식이 깔려 있다는 프로이트의 사상이 녹아 있다.

그의 주장은 증거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 순전히 상상이지만 일부 사실일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한 예로 성경에는 이집트의 왕비가 모세를 물에서 건져 올린 후 히브리어로 ‘건져 올렸다’는 뜻의 ‘모세’라고 이름 지었다고 돼 있는데 이는 믿기 어렵다. 이집트 공주가 노예들 언어인 히브리어를 알기도 어렵거니와 어차피 이집트 궁정에서 기를 아이에게 히브리 이름을 지어줄 이유가 없다. 그보다 모세는 ‘누구의 아들’이란 뜻의 이집트 이름이고 이집트인일 가능성이 있다.

프로이트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1887년 이집트의 옛 수도였던 텔 엘 아마르나에서 ‘아마르나 이단’의 증거가 발견됐기 때문이다. ‘아마르나 이단’이란 기원전 14세기 중반 이집트의 파라오였던 아크나텐이 그때까지 이집트 종교였던 다신교를 폐지하고 태양신 아텐만을 숭배하는 새 종교를 창시한 일을 말한다.

아크나텐은 이집트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주로 꼽히는 아멘호텝(‘아문 신은 만족한다’라는 뜻) 3세의 아들로 원래 이름은 아멘호텝 4세였으나 새 종교를 창시한 후 자신의 이름을 ‘아텐의 효력’이란 뜻의 아크나텐으로 바꾸고 수도도 아마르나로 옮긴다. 그의 아내는 가장 아름다운 이집트 왕비로 손꼽히는 네페르티티였다.


그러나 그의 치세 동안 외세의 침입이 빈발하고 가뭄과 기근으로 사회가 불안정해지면서 개혁은 실패로 끝나고 집권 17년만에 그가 사망하자 전통적 다신교를 신봉하는 세력이 다시 권력을 잡는다. 이들은 파피루스는 물론이고 돌에 새겨진 아크나텐의 이름과 업적을 모조리 지워 그에 관한 역사를 백지로 만들고 수도도 아마르나를 버리고 테베로 옮긴다.

이들에 업혀 권좌에 오른 것이 이집트 파라오중 가장 유명한 투탄카문이다. 그의 원래 이름은 ‘아텐의 이미지’라는 뜻의 투탄카텐이었으나 종교 개혁이 실패로 돌아간 후 ‘아문의 이미지’란 뜻의 투탄카문으로 바뀐다. 그는 9살에 보위에 올라 18세에 사망한 단명한 왕으로 이집트 역사에 기록될 일을 하지도 못했지만 1922년 그의 무덤이 도굴되지 않은채 발견되고 5천개가 넘는 유물이 나오면서 가장 유명한 왕이 됐다.

별 볼 일 없는 왕 무덤에서 이처럼 찬란한 유물이 나온다면 그보다 훨씬 대단한 파라오 무덤에는 얼마나 많은 부장품이 들어 있었을지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최근 PBS는 ‘투탄카문, 친구와 적들’이란 다큐멘터리를 통해 아크나텐의 종교 개혁을 소개했고 LA 오페라는 필립 글래스의 3부작 중 하나인 ‘아크나텐’을 공연했다. 3천년이 넘는 세월이 지났지만 아크나텐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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