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미국의 변화에 적응하는 유럽

2026-01-21 (수) 12:00:00 파리드 자카리아 워싱턴포스트 칼럼니스트 / CNN ‘GPS’ 호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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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수 년 동안, 유럽은 행동에 나서기엔 너무 분열되었고, 결정을 내리지 못할만큼 무기력하며, 전략적 사고를 하기엔 지나치게 안일하다는 조롱을 받았다. 그러나 지난해 유럽은 조용하면서도 기민하게 행동하며 이같은 고정관념을 뒤짚었다. 미국이 어디로 튈지 모를 예측불가능한 태도를 취하자 유럽은 반발하거나 굴복하는 대신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백악관에 재입성한 도널드 트럼프가 거의 한 세기만에 최고 수준의 관세를 부과하자 많은 사람들은 유럽이 보복조치를 취할 것으로 예상했다.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무역전쟁은 인플레이션을 부추기고, 공급망을 교란시키며, 이미 취약한 경제 성장을 더욱 약화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유럽은 보복의 유혹을 뿌리쳤다. 대신 압력을 감수하고 사태 악화를 피하며 시간을 벌었다. 이같은 절제 덕분에 세계 경제가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그리고 지난주, 유럽은 행동에 나섰다. 유럽연합(EU) 회원국들은 25년간 교착상태에 빠졌던 협상을 타결하며 브라질, 아르젠티나, 파라과이 및 우루과이와 포괄적인 무역협정을 매듭지었다. 협정이 비준되면 인구 기준으로 세계 최대규모의 자유무역지대 하나가 추가되는데 이 지역의 역내 인구만도 7억 명을 헤아린다.


유럽이 라틴 아메리카에 손을 내민 것 역시 고립된 움직임이 아니다. 최근 몇 주 동안 브뤼셀과 베이징은 전기차, 정부보조금과 시장접근 등을 둘러싸고 광범위한 갈등으로 번질 뻔 했던 새로운 무역마찰을 해소했다고 밝혔다. 유럽은 중국의 산업정책과 정치 시스템을 여전히 신뢰하지 않지만, EU는 중국을 꼭 필요한 동반자로 여기고 있다.

이와 동시에 유럽은 동남아시아와의 관계강화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 EU는 현재 싱가포르, 베트남과 무역협정을 체결했고, 인도네시아와 무역협상을 마무리지었으며, 역내 다른 국가들과도 협상을 추진 중이다. 동남아시아는 이미 유럽 바깥에서 세 번째로 큰 EU의 무역 파트너이다.

교역 다변화에 대한 이같은 본능은 유럽 넘어로 확산되고 있다. 캐나다를 생각해보라. 과거 20년 동안, 오타와는 미국과 경제적, 외교적, 정치적으로 더욱 심화된 통합을 이루는 것에 자국의 미래가 달려 있다는 명확한 전략적 판단을 내렸다. 2024년만 해도 캐나다 수??품의 75% 이상이 남쪽으로 흘러들어갔다. 미국과 캐나다은 냉전 시대 종식 이후 가장 성공적인 통합 사례 가운데 하나였다.

중국측 무역 자료는 세계가 베이징이 아닌 미국을 상대로 “위험제거”(derisking) 작업을 벌이고 있음을 보여준다. 미국과의 교역량이 급감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전체 수줄은 계속 증가세를 유지하고 있다. 2025년도 중국의 무역흑자는 라틴 아메리카, 아프리카, 유럽과 대다수 아시안 국가로의 수출이 증가한데 힘입어 사상 최대규모인 1조 2,000억 달러에 육박했다. 관세는 중국을 고립시키지 않았다. 오히려 여러 국가들로 하여금 베이징과의 교역을 이어가도록 장려하는 결과를 낳았다.

여론조사는 이같은 변화를 그대로 반영한다. 유럽외교관계이사회(ECFR)가 실시한 주요 여론조사에 따르면 인도, 브라질,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핵심 신흥 경제국 가운데 중국이 아닌 미국 주도의 경제 블록에 가입하길 원한다는 응답자들의 비중이 단 2년 사이에 15-19 퍼센트 포인트 하락했다. 또한 10개 유럽국가들 중 단지 16%만이 미국이 우방국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하지만 응답자의 과반수가 여전히 미국을 핵심 무역 파트너로 간주하고 있는데 비해 중국에 대한 시각은 따듯하다기보다 엇갈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조지 여 전 싱가포르 외교장관의 최근 발언대로 “트럼프는 다극화 시대로의 전환을 가속화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미국의 이미지가 아니라 미래 권력이다. 중국은 현대 역사상 가장 탄탄한 경제생태계 중 하나를 체계적으로 구축하고 있다. 핵심 광물 가공 분야를 장악했고, 배터리 및 전기차 부문에서 규모의 경제에 도달했으며, 충격과 재제 및 관세를 견뎌내기 위해 수출시장을 다변화하고 있다.

믿을만한 미국의 유일한 대응책은 지난해 제조업부문의 고용 감소와 맞물려 있는 관세가 아니라 우리의 자체적인 생태계 구축이다. 미국은 여전히 특출난 강점을 갖고 있다. 우방과 파트너 국가들로 구성된 방대한 연결망은 세계의 첨단기술, 자본, 숙련된 노동력과 소비수요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다. 이론적으로 이같은 연합은 우방국에서 핵심 원자재를 조달해 신뢰할만한 파트너 국가들로 제조시설을 분산시키며, 연구개발을 공유하고, 개방적이고 예측가능한 시장을 유지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담당한다.

실제로 미국은 잇점의 상당부분을 헛되이 낭비했다. 우방국들을 거래 상대로 취급하고, 관세를 무기화해 그들을 압박하며, 오랫동안 지켜온 약속을 협박으로 바꾸어 놓으면서 워싱턴은 이들로 하여금 자구책을 찾아나서도록 만들었다. 더욱 특이한 것은 미국이 더 이상 세계적인 추세를 선도하는 국가가 아니라는 점이다. 세계가 교역과 협력 증대를 찾고 있는데 반해 미국은 보호주의와 민족주의를 향해 뒷걸음질치고 있다.

수 십년 동안, 세계 질서는 미국이라는 토대위에 위에 구축되었다. 무역은 미국이 설계한 제도를 통해 움직였고, 안보는 미국의 보장에 의존했으며, 위기는 좋든 싫든 워싱턴에 의해 관리됐다. 이같은 토대는 여전히 존재한다. 그러나 세계는 더 이상 그 위에 질서를 세우려 하지 않는다. 이제는 미국이라는 토대 위가 아니라 그 주변에서 새로운 세계 질서를 만들어 가고 있다.

<파리드 자카리아 워싱턴포스트 칼럼니스트 / CNN ‘GPS’ 호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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