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123년전 갤릭호에 실려왔던 작은 씨앗 (미주 한인의 날을 다시맞아)

2026-01-06 (화) 07:56:29 장재웅 워싱턴 하늘비전교회(MDV) 목사,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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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년 1월 13일, 한인 101명과 통역 1명이 갤릭호를 타고 하와이 호놀루에 도착했다. 이것이 미주 한인이민의 시작이다. 주목할 사실은 이들 가운데 절반 이상이 기독교인이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초기 한인 이민자들은 사탕수수 농장의 고된 노동 속에서도 주일에는 일하지 않는 원칙을 지켰고, 도착하자마자 교회와 학교를 세웠다. 그 결과 이민 초기부터 하와이에만 39개가 넘는 한인 교회가 세워졌다.

그런데 이 일은 우연이 아니었다. 19세기 말 조선 사회는 개항과 외세의 압력 속에서 정치·경제·사회적 질서가 급격히 무너지고 있었다. 당시의 전통 종교는 더 이상 변화를 갈망하던 민족의 영적, 윤리적 갈증을 해소시켜 주지 못하고 나라는 방향을 잃고 흔들렸다. 바로 그 혼란의 시기에 선교사들에 의해 전해진 기독교의 복음은 단순한 종교가 아니라 새로운 가치 체계이자 삶의 질서, 그리고 미래를 향한 희망의 언어로 받아들여졌다.

초기 한국 기독교는 병원과 학교, 출판사를 세워 교육과 의료, 계몽사업, 공동체 윤리를 함께 품었다. 신앙은 민족의 절망 속에서 인간의 존엄과 공동선, 그리고 다음 세대를 향한 비전을 일깨우는 힘이 된 것이었다. 이러한 토대 위에서 출발한 미주 한인 이민 역시, 처음부터 공동체 중심의 이민이었다.


그러나 2026년 오늘, 우리는 다시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오늘의 미주 한인 사회는 그 출발의 정신을 얼마나 기억하고 있는가. 오늘의 한인 사회는 물질적 풍요와 사회적 성취에도 불구하고, 세대 갈등, 정체성 혼란, 정치적 분열, 신뢰의 붕괴라는 또 다른 위기 앞에 서 있다.

이민 1세대의 희생으로 세워진 토대 위에서, 2세·3세들은 언어와 문화의 경계에서 방황하고 있다. 교회와 한인 단체들 역시 사회적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는 무거운 과제를 안고 있다. 이 지점에서 역사는 우리에게 분명히 말한다.

초기 한인 이민자들이 교회를 세운 이유는 건물을 남기기 위함이 아니라 공동체의 중심을 세우기 위함이었다. 학교를 세운 이유는 성공을 보장하기 위함이 아니라 사람을 세우기 위함이었다. 신앙은 개인의 구원을 넘어서 지역사회의 공동체를 살리는 공공성의 힘이었다.

2026년 미주 한인의 날은 단순한 기념일이 아니다. 이 날은 필자를 포함해 250만 미주땅의 이민자들이 “우리는 왜 이 땅에 왔는가”, “무엇을 지키며 살아가야 하는가”를 다시 묻는 영적·역사적 성찰의 날이다.

성어거스틴이 “과거는 하나님의 긍휼에, 현재는 하나님의 사랑에, 미래는 하나님의 섭리에 맡기라(Entrust the past to God's mercy, the present to God's love, and the future to God's providence)"고 말했듯이 고령사회속에서 시니어세대와 성장하는 다음 세대를 가슴에 품고 다시 길을 정해야 할 시간이다.

미주 한인 사회가 다시 한 번 신앙의 공공성, 공동체적 책임의 가치를 회복할 때, 123년 전 갤릭호에 실려 왔던 그 작은 씨앗은 오늘도 살아 역사하며 새로운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1903년 1월 13일에 시작되어 126년을 맞은 미주 한인의 날, 기억은 추억으로 머무르지 않을 때 비로소 능동적인 현재, 가슴벅찬 미래가 될 것이다.

붉은 말의 해, 2026년 새해, 붉은 말처럼 열정과 용기 그리고 힘찬 추진력으로 비전의 신발을 싣고 더 큰 도약을 이루는 한 해가 되시기를 기원한다.

<장재웅 워싱턴 하늘비전교회(MDV) 목사,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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