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유럽 대자연의 정수… 페로제도(Faroe Islands)

2026-01-01 (목) 07:24:40 곽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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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대자연의 정수… 페로제도(Faroe Islands)

절벽 끝에서 곧장 바다로 떨어지는 물라포수르 폭포와 마을 풍경.

세상 끝 바람은 내 마음 깊은 곳까지 흔들어 놓았다. 2만 년 전, 거대한 빙하가 지나간 자리. 그 흔적 위에 18개의 섬이 북대서양에 흩어졌다. 그곳이 페로제도다. 노르웨이, 아이슬란드, 스코틀랜드 사이, 바람을 정면으로 맞으며 선 작은 군도. 고립된 듯 보이지만 그 안에는 신비가 가득하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을 묻자, 여행가 522명 중 477명이 이곳을 꼽았다. 인구는 5만 명 남짓, 양은 7만 마리. 사람보다 양이 더 많은 섬이다. 수도사들이 불빛을 지피던 자리에 바이킹이 닻을 내렸고, 서기 999년에는 기독교 찬송이 파도에 실려 왔다.

물라포수르- 바다로 떨어지는 노래


내가 이 섬을 찾은 이유는 한 장의 사진 때문이었다. 절벽 끝에서 곧장 바다로 떨어지는 물라포수르 폭포. 언젠가 그 앞에 서리라 마음먹었고, 마침내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사진보다 더 크고 더 외로웠다. 흰 포말로 부서지는 물줄기, 바람이 물줄기를 갈라 마을 쪽으로 흩뿌렸다. 언덕 위 가스달루르 마을에는 풀 지붕 집과 닭, 검은 목조 주택이 어울려 있다.

마을의 작은 카페에는 아버지와 아홉 살 딸이 있었다. 여섯 자녀 중 도시로 떠나지 않은 막내가 아버지를 돕고 있었다. 소녀는 K 팝을 들으며 외로움을 달랜다고 했다. 새장 속 네 마리 메추라기는 소녀의 친구였다. 커피 네 잔과 케이크 두 조각은 14달러. 나는 22달러를 놓고 나왔다. 값보다 소중했던 것은 우리가 나눈 미소와 눈빛이었다.

트래라니파- 호수와 바다가 만나는 절벽

폭포에서 조금 더 가면, 호수와 바다가 만나는 트래라니파 절벽이 나타난다. 하늘에 건 거울 같은 호수 너머, 아래로 대서양이 펼쳐졌다. 그곳에 서면 발걸음은 한없이 작아지고, 바람은 오래된 목소리처럼 귓가를 스친다. 대서양의 장엄함과 호수와 절벽의 광활함이 만나, 한 편의 시가 된다.

바람이 읽는 책

페로제도의 풍경은 절벽과 폭포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아버지와 딸, 닭과 메추라기, 케이팝을 흥얼대던 목소리까지 모두가 한 권의 책처럼 이어진다. 폭포 앞과 마을 절벽에 서 있으면, 바람이 오래된 문장을 읽듯 지나간다. 빙하가 남긴 흔적, 사람이 살아낸 시간이 그 안에 담겨 있다. 나는 그 책의 한 페이지에 발자국 하나를 남겼다.

토르스하운- 바람과 바다가 키운 도시

페로제도의 심장, 수도 토르스하운. 세상 끝의 작은 항구 도시지만 영혼은 크다. 언덕 위 흰 벽과 시계탑의 교회는 수백 년 동안 기도의 등불이었다. 좁은 골목에는 풀 지붕 집들이 이어진다. 붉은 벽, 검은 목재, 초록 잔디가 어울려 북유럽의 오래된 시처럼 다가왔다. 풀 지붕은 장식이 아니라 바람을 막기 위한 지혜였다. 항구에는 형형색색의 집, 요트, 어선이 가득하다. 흰 파도와 빨간 배, 노란 건물이 수채화처럼 어우러진다.

도시 외곽의 민속촌에는 천 년을 버텨온 풀지붕 집, 페로제도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 키르큐보아르가르뒤르(Kirkjubøargarður)가 있다. 그 앞에 서면 깨닫게 된다. 인간의 시간은 흘러가도 신앙과 삶의 흔적은 바람 속에 남는다는 사실을. 힘은 거대한 성이나 권력에 있지 않다. 풀 지붕 위에 핀 작은 꽃, 파도에 흔들리는 낡은 배, 그 소박한 일상 속에 있다. 섬 위로 바람이 지난다. 언젠가 그 바람에 얼굴을 맡겨 보시길. 페로제도는 유럽 대자연의 정수다.

<곽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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