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금요단상] 낙엽 위에 남겨진 향

2025-11-21 (금) 12:00:00 이희숙 시인·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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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햇살마저 저물어 가는데, 흔들리는 잎사귀 사이로 시 낭송 소리가 흘러나오는 듯하다. 낙엽 위에 적힌 이야기가 남아 있는 향으로 전해진다.

K 작가 선생님을 처음 만난 건 2021년 7월, 내 첫 시집과 동시집 출판기념회에서였다. 안면이 없었지만, 쾌히 오셔서 <코알라의 꿈> 동시를 암기하여 낭랑한 목소리로 낭송해주셨다. 미주한국문인협회 아동분과위원장으로서 원고를 청탁하면서 연락을 주고받았다. 밝은 에너지로 동심을 위한 글쓰기에 적극적이셨다.

어느 날 “투석 생각만 하면 숨이 막혀요. 남편 투석을 돕는 선생님이 크게 보입니다. 지금은 상태가 별로 안 좋아요.” 근심에 가득 찬 메시지를 받았다. 남편이 신장 투석을 받게 된 지 세 번째 해이기에 내 경험을 이야기하며 그분을 격려했다.


“목요일부터 복막투석을 위해 교육받기로 했어요. 그동안 음식을 너무 가려 먹어서 몸도 많이 상했어요. 잘 먹고 옛날 모습대로 명랑해지려고요. 질 좋은 삶을 살아가는 방법을 모색해 봅니다. 선생님의 격려에 힘을 얻습니다.”라며 긍정적으로 애쓰셨다.

24년 1월, ‘투석 시작!’이라는 메시지를 받았다. 투석하는 경과를 가끔 알려주기도 했다. “이번 주엔 피가 너무 부족해서 일단 투석을 미루고 조혈 주사 주 1회씩 6주간 맞고 다시 피검사 하기로 했습니다. 투석 받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 그 순간이 소중하고 값지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좋으신 하나님, 그 뜻을 헤아릴 수 없으나 감사합니다.”

선생님은 마지막 날이 될 거라는 걸 예감하셨을까? 그 상황에서 해야 할 일을 찾아 추진하셨다. <시인 만세>를 창단하여 시와 쉼표가 있는 콘서트를 동인들과 준비했다. 빨간 드레스를 입은 선생님은 ‘백십 층에서 떨어지는 여자’라는 시를 절규하듯 읊으셨다. 그 열정은 내 가슴에 고스란히 아로새겨졌다.

그해 8월 미주문협에서 문학 캠프를 개최했다. 꼭 참석하고 싶다고 하셔서 내가 룸메이트가 되어 도와드리겠다고 했다. 그런데 몸이 자꾸 붓는 현상 때문에 의사를 찾아 의논한 결과, 참석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선생님은 동화책 출간에 힘을 쓰셨다. 동화책 <할리우드 블러바드의 별>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여전히 고우신데 남의 부축에 의지해 참석하셨다. 너무 빠른 속도로 건강이 나빠지지 않는가.

“요사이 선생님의 동화집을 읽고 있어요. 선배님 뒤를 이어 저도 동심을 아름답게 언어로 짜 펴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부디 그 빛을 간직하고 곁에 계셔주세요.”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그렇지만 읽으셨을까? 눈도 희미하고 귀도 안 들리신다고 했다. 응답이 없는 나의 다짐으로 남아야 했다.

25년 10월 31일에 하나님 품에 안기셨다는 소식을 받았다. 어쩌나! 찾아가 뵙지 못했다는 죄송한 마음으로 머무름과 이별 사이에서 그리움을 담아 편지를 쓴다. 그분의 마음 조각이 낙엽 되어 흘러가지만,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그분을 기억하는 모든 시간 속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선생님, 생명 강가에서 좋은 글로 세상을 적시며 길이 머무소서!”

<이희숙 시인·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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