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화요 칼럼] 흔적을 남기고

2025-09-30 (화) 12:00:00 김영화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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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아팠을 세월의 흔적이 보인다. 산 아래 펼쳐진 검은 바위들이 햇빛에 반짝인다. 붉은색 높은 모래 언덕 아래 검은 돌무더기들은 마치 고대의 신전에 있는 조각품들처럼 각기 다른 모양으로 서 있다. 가까이 다가가 만져 보니 돌들은 매끈하기보다는 구멍이 숭숭 뚫려있다.

캘리포니아의 파실 폴스(Fossil Falls). 수십만 년 전 화산이 폭발해 용암이 흘러내리고, 만 년 전 빙하가 녹아내려 폭포를 이루던 자리가 그대로 굳어져 남은 곳이다. 이름 그대로 과거의 폭포가 화석처럼 잠들어 있다. 묵묵히 서 있는 검은 바위 위에 올라서서 귀를 바짝 대 본다. 이곳의 오랜 역사와 애절한 사람들의 사랑 이야기와 그들의 꿈이 들어있을 것 같은 바위 구멍을 바람이 기웃거리며 지나간다. 하루를 살아도 크고 작은 흔적이 추억으로 남아 그리움이 되는데 수만 년을 견뎌온 이들의 삶을 어떻게 짐작이나 할 수 있겠는가.

파실 폴스는 오직 자연의 변화만 간직한 곳이 아니다. 크고 작은 새까만 현무암에는 오래전 이곳에 살면서 희로애락을 함께했던 원주민들의 혼이 담겨있다. 수천 년 전, 얼음으로 덮인 높은 산맥에서는 영혼까지 시리게 맑고 차가운 물이 쏟아져 흘러 폭포가 되었다. 그 물이 모여 큰 호수를 만들어 이곳의 오아시스가 되었다. 원주민들은 현무암으로 생활 도구를 만들고 농사를 짓고 강가에서 노니는 오리와 새, 물고기와 함께 부족함 없이 행복했을 것 같다. 그들의 손끝으로 영혼을 담아 돌에 새겨놓은 사람과 양의 그림이 어제 있었던 일처럼 선명하게 보인다. 눈을 감고 잠시 사막의 바위에 귀를 기울인다.


바람결에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메아리 되어 울려오고 바위의 구멍마다 구수한 밥 짓는 냄새가 나는 것 같다. 그 속에 새겨진 삶의 따뜻한 온기가 세기를 건너 지금까지도 가슴 깊숙이 전해진다. 이 화산돌 무더기가 모인 사막은 단순히 낯선 또 다른 풍경을 만나는 일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를 잇는 다리를 건너는 일이 됐다.

지나간 세월의 역사 없이 현재 포스트 모던 시대를 사는 것이 아니다. AI가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 같은 급변하는 세상에 사는 우리는 다음 세대에 어떤 다리가 되어주게 될까? 그들의 박물관에 우리의 흔적이 어떤 모습으로 남겨질까? 오늘 내 앞에 서 있는 이곳의 흔적을 보는 만큼의 감격이 있을지 모르겠다. 이곳 입구의 안내판에 파실 폴스는 불과 물로 조각된 곳이라고 쓰여있다. 나는 종종 수십만 년 전에 있었던 검은 돌무더기 같은 자연의 변화 앞에서 유한한 인간의 존재를 생각해 본다. 그리고 바위에 새겨진 그림에서, 돌 구멍마다 그때 이곳에 살았던 원주민들의 삶을 상상해 본다.

검은 바위 앞에서의 사유는 깊어지고, 사막의 바람은 여전히 불고, 바위는 그 자리에 서 있다. 무구한 자연의 역사도 인간의 기록 없이는 오래 살아 남지 못한다. 파실 폴스 존재의 증인이 되어주고 싶어 나 역시 오늘 그 연대기의 작은 한 줄을 보태고 돌아선다. 삶은 결국 거대한 자연의 연대기에 작은 발자국을 남기는 일인지 모른다. 이 세상에 소풍 나온 인생길에 내가 남긴 발걸음 또한 언젠가 누군가에게 전해질 것을 생각하며 옷매무새를 고친다. 내가 떠난 자리에는 어떤 흔적이 남겨질까?

<김영화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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