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창용(왼쪽) 한국은행 총재와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 [연합]
뜨거운 감자’스테이블코인
▶실제 화폐처럼 쓸 수 있는 디지털 코인
▶거래 빠르고 환전 수수료 저렴 등 장점
▶연간 결제액 비자·마스터카드 이미 넘어
도입 신중론자, 이창용 한은 총재
▶마구잡이 통화 땐 외환·통화 정책 무력화
▶ ‘코인런’발생하면 금융시스템도 해칠 것
▶은행 기반 코인부터 추진‘안정성에 무게’
적극 도입론자, 김용범 정책실장
▶민간에 발행 허용해야만 글로벌 연동성
▶코인 시장 능동적 참여자 자리매김 기회
▶민간자본 기반 코인 추진‘혁신성에 무게’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와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 경제·금융 분야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탁월한 식견을 갖춘 브레인이다. 학자(이 총재)와 관료(김 실장)로 출발은 달랐지만 학구적 스타일의 두 사람은 걸어온 길에 공통분모가 꽤 많다. 서울대 경제학과 1년 선후배(이 총재 80학번, 김 실장 81학번)로 이 총재는 하버드대에서 김 실장은 조지워싱턴대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 총재는 국제통화기금(IMF) 아시아태평양국장을 비롯해 국제기구에서 오랜 경험을 쌓았고, 김 실장 또한 세계은행(IBRD) 선임 이코노미스트를 지냈다. 8년 시차를 두고 금융위원회 부위원장 자리 바통을 주고받기도 했다.
그런 두 사람이 이재명 정부가 들어서면서 미묘한 시각차를 보이는 분야가 있다. 요즘 가상화폐 투자자들에게 매우 뜨거운 원화 스테이블코인 이슈다. 김 실장은 대통령실 입성 후에는 언급을 자제하고 있지만 직전까지 가상자산 싱크탱크인 해시드오픈리서치(HOR) 대표로 재직하며 원화 스테이블코인의 도입과 법제화를 적극 주창해왔다. 이를 공약으로 내걸었던 이재명 대통령이 최전선에 있던 그를 정책실장으로 임명하자 증시에선 스테이블코인 관련주들이 ‘김용범 테마주’로 엮여 급등했을 정도다.
반면 이 총재는 원화 스테이블코인 도입에 매우 신중하다. 중앙은행 고유 권한인 화폐 발행권을 민간이 넘보는 것이니 당연하다. 자칫 통화정책은 물론 외환정책과 조세정책까지 뒤흔들 괴물이 될 수도 있다는 메시지를 연일 쏟아낸다. 두 사람의 시각은 적극적 도입론자와 신중론자의 의견을 대표하는 측면이 강하다. 과연 누구의 생각이 옳은 걸까.
■ 왜 스테이블코인인가스테이블코인이 뭔지부터 짚고 가자. 블록체인에 기반을 둔 가상자산(암호화폐)의 하나라는 것쯤은 다들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 가상자산은 가격이 요동을 친다. 만약 물건을 사고 비트코인으로 결제를 한다면 오늘과 내일 가격이 다르니 업체나 소비자 모두에게 엄청난 리스크다.
스테이블코인은 명칭 그대로 안정적인(stable) 화폐(coin)다. 비트코인이나 이더리움 같은 암호화폐에서 가격 변동성이라는 리스크를 제거하고, 실제 화폐처럼 쓸 수 있게 만든 디지털 코인이라고 보면 된다. 일반적으로 법정화폐에 가치를 1대 1로 연동해 발행된다. 달러 연동 코인이라면 1개의 코인이 1달러의 가치를 갖도록 설계되는 식이다. 소유자가 발행사에 코인을 제시하면 언제든 달러로 환전이 가능하다.
스테이블코인 거래는 가히 폭발적이다. 작년 스테이블코인 연간 송금액은 총 27조6,000억 달러, 우리 돈으로 4경 원에 육박한다. 놀라운 건 글로벌 카드 결제사인 비자, 마스터카드의 연간 결제액(23조8,000억 달러)을 넘어서는 금액이라는 점이다. 국내 수요도 팽창한다. 올해 1분기 국내 가상자산 거래소에서 오간 달러 기반 코인 규모는 57조 원이다. 월 20조 원에 육박한다.
■ 두 가지 선택지 : 은행 기반이냐 자본시장 기반이냐대세는 ‘자산 기반’이다. 달러나 국채, 금 등 안전자산을 담보로 발행된다. 소유자가 발행사에 코인을 제시하면 언제든 달러로 환전이 가능하다. 별도 담보 없이 사전에 설정된 알고리즘에 따라 공급량을 조절해 가치를 유지하는 ‘알고리즘 기반’ 스테이블코인도 있지만, 이름과 다르게 ‘스테이블’하지 않다. 2022년 대폭락 사태 충격을 부른 테라-루나가 알고리즘 기반이었다.
‘자산 기반’은 다시 ‘은행’을 기반으로 하느냐, ‘자본시장(민간)’을 기반으로 하느냐로 나뉜다. 은행 기반 코인은 발행 주체를 은행이나 계열 금융기관으로 한정한다. 반면 자본시장 기반은 핀테크 등 민간기업들이 직접 코인을 발행할 수 있다. 대표적인 자산 기반 스테이블코인인 테더의 USDT와 서클의 USDC 모두 자본시장 모델이다.
김 실장과 이 총재의 견해가 충돌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한 사람(김 실장)은 스테이블코인의 ‘혁신성’에 포커스를 맞추는 반면, 또 한 사람(이 총재)은 ‘안정성’에 훨씬 더 무게를 둔다. 김 실장은 자본시장 기반 코인 육성이 우리나라가 스테이블코인 시장에 능동적 참여자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길이라고 보지만, 이 총재는 은행 기반 코인부터 아주 조심스럽게 추진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김 실장은 업계에 몸을 담았고, 이 총재는 금융시장 안정을 책임지는 중앙은행 총재이니 자리가 주는 시각 차이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 이창용 ”비은행 허용 시 19세기 혼란 부를 것”이 총재는 지난 10일 금융통화위원회 기자간담회에서 작심한 듯 원화 스테이블코인 관련 본인의 생각을 털어놓았다. 원화 코인 자체에는 동의를 하지만 발행권을 은행에만 엄격하게 부여해야 한다는 게 골자다. “비은행기관에까지 발행을 허용한다면 민간화폐가 봇물을 이뤘던 19세기처럼 큰 혼란을 부를 것”이라는 격한 표현까지 썼다.
이 총재의 우려는 이렇다. 통제되지 않는 새로운 통화가 생겨나고 해외로 마구잡이로 빠져나가면 통화정책도 외환정책도 무력화될 수 있다. 만약 대규모 환매가 일어나는 ‘코인런’이 발생하면 금융시스템 안정도 급격히 해칠 수 있다. ‘중앙은행의 중앙은행’이라는 국제결제은행(BIS)도 최근 보고서에서 “스테이블코인이 통화주권을 위협할 수 있다”며 “특히 자금세탁, 테러자금 등 불법 행위에 악용될 소지가 다분하다”는 경고를 내놓았다.
대체로 전통적 금융권이나 연구기관에 몸담아 온 이들은 한은 견해에 동조한다. 이정두 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금융 시스템 안정과 통화 정책을 최우선에 둬야 할 한국은행으로서는 당연한 고민”이라며 “거래소에서 이뤄지지 않는 월렛과 월렛 간 코인 이동은 통제가 어려울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런 우려를 충분히 감안하더라도 한은이 과도하게 보수적으로 접근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효봉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는 “각국 중앙은행들은 이미 우려를 넘어설 수 있는 해결책을 만들어가고 있다”며 “한은도 어떻게 하면 모니터링과 규제를 잘할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지 계속 위험하다고 반대만 해서는 곤란하다”고 지적한다.
■ 김용범 “혁신 없이 시장 주도할 수 있겠나”지난 5월 해시드오픈리서치 대표이던 김 실장은 연구자들과 함께 스테이블코인 리포트를 냈다. 제목이 ‘디지털 G2를 위한 원화 스테이블코인 설계도’. 스테이블코인을 통해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디지털 강국으로 가자는 담대한 내용이다. 직접 쓴 리포트 서문을 보면 김 실장이 왜 ‘자본시장 기반 코인’을 강력히 주창하는지 알 수 있다. 그는 은행에만 스테이블코인 발행을 허용한다면 안정성은 있겠지만 △확장성도 없고 △기술혁신은 쉽지 않고 △글로벌 연동성도 떨어진다고 단언한다. 김 실장은 이렇게 묻는다. 단순한 ‘규제 허용자’에 그칠 것인가, 아니면 디지털 통화 질서를 공동 설계하는 능동적 플레이어가 될 것인가.
민간에 발행을 허용하면 어떤 혁신이 가능한 걸까. 리포트 작업에 참여했던 강희창 포필러스 공동창업자는 카카오페이나 네이버페이를 예로 들어 설명한다. “카카오페이가 나오기 이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은행 계좌로 송금하고 신용카드로 결제하면 되지 않느냐고 했잖아요. 하지만 각종 편의기능이 결합되면서 새로운 수요까지 창출하고 있죠. 은행과 민간 기반 스테이블코인의 차이는 그런 겁니다.”
김용범 실장은 보고서에서 이를 ‘신뢰는 구조로 만들어진다’는 말로 설명한다. △준비자산은 매일 공개되는 데이터로 자동 검증되고 △자산이 부족하면 발행이 차단되며 △상환 요청이 들어오면 1대 1로 바로 상환될 수 있도록 설계가 돼 있다는 것이다. “누군가가 ‘믿어 달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그 ‘믿을 이유’를 시스템 안에 아예 설계해 둔다”는 주장이다.
■ ’원화’는 성공할 수 있을까하지만 ‘스테이블코인의 미래가 창창하다’는 것과 ‘원화 스테이블코인의 미래 또한 밝다’는 말의 등식은 성립하지 않는다. 지금 스테이블코인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것은 테더(USDT) 서클(USCD) 등 달러 코인이다. 전체 유통량의 99.6%다. 글로벌 결제의 40~50%를 점유하는 달러의 지위와 비교해도 극단적 독점이다. 유로, 엔 코인도 맥을 못 추는데 하물며 원화는 기축통화도 아니다. 은행이 됐든 민간이 됐든 원화 코인을 만든다 해도 비집고 들어갈 틈이 잘 보이지 않는다. 이정두 연구위원은 “스테이블코인은 국경이 없기 때문에 제1 기축통화인 달러에 연동하는 코인으로 수렴될 수밖에 없다. 원화 코인이 존재감을 보일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진단한다.
하지만 달러 코인이 초기 시장을 선점해서 그렇지 다른 통화 기반 코인도 수요처를 잘 찾으면 얼마든 성장 가능성이 있다는 희망적 전망도 있다. 전문가들이 많이 예로 드는 것이 K콘텐츠 시장이다. “예를 들어 금융 인프라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국가의 K팝 팬덤층들이 국내 엔터사 사이트에 들어와서 비자나 마스터카드가 없어도 달러 스테이블코인을 원화 코인으로 바꿔 낮은 수수료로 결제할 수 있도록 해준다면 상당한 시장을 형성할 수 있을 것”(서병윤 소장)이란 얘기다. 꼭 엔터 영역만은 아니다. 전자제품, 의류, 화장품 등에도 얼마든 활용이 가능하다.
김 실장과 이 총재, 어느 한쪽의 시각이 100% 옳을 순 없다. 공격적으로 치고 나가더라도 탄탄한 규제가 바탕이 돼야 함은 물론이다. 분명한 것은, 무서워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기회는 영영 잡을 수 없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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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태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