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법대 출신 고시생→생계형 셰프의 ‘전라도 프렌치’

2025-07-23 (수) 12:00:00 장준우 셰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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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준우가 만난 셰프들

▶ 알랭 공다현 셰프

법대 출신 고시생→생계형 셰프의 ‘전라도 프렌치’

광주 프렌치 레스토랑 ‘알랭’의 공다현 셰프가 주방에서 요리를 하고 있다. 사법고시를 준비하던 공 셰프는 요리를 독학해 10년 넘게 레스토랑을 운영 중이다. [장준우 제공]

레스토랑의 수명이 길면 3년, 짧으면 2년인 요즘이다. 운 좋게도 5년째에 접어들었지만 늘 아슬아슬한 곡예 줄타기를 하는 듯한 기분은 여전하다. 매해 업을 이어 오면서 쌓이는 건 길게 살아남아 자리를 지키며 자신만의 세계를 펼쳐나가는 이들에 대한 존경심이다. 공다현(45) 셰프는 광주에서 12년째 모던 프렌치 레스토랑 '알랭'을 운영하고 있다. 한식에 있어서는 맛의 고장이지만, 양식의 불모지였던 광주에서 '전라도 프렌치'란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 인심 좋아 보이는 푸근한 인상 너머 번뜩이는 요리에 대한 열정, 그리고 나고 자란 땅에 대한 애정이 엿보였다.

■ 고시생, '생활의 달인' 100편 정주행

공 셰프의 삶은 여느 프렌치 요리사의 서사와는 다르다. 해외 엘리트 코스를 밟은 게 아닌 철저한 생계형으로 시작했다. 전남대 법대를 나온 그는 29세까지 고시 공부에 매달렸다. "어중간한 삶이었어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그가 자신의 20대를 평가하는 말이다. 운명이 바뀌게 된 건 2010년 결혼과 함께 찾아온 절박함이었다. 고시를 포기하고 막막한 상황에서 '생활의 달인' 100편을 정주행하며 진로를 찾기 시작했다. "시내에 가보니 간판 종류가 식당, 술집, 미장원, 옷가게, 카페 다섯 종류더군요. 이 중에 1개만 해도 먹고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죠."


동네 돈가스집 아르바이트부터 시작했다. 첫날부터 주방일뿐만 아니라 화장실 청소까지 기꺼이 하는 모습을 본 사장이 며칠 후 매니저 직을 제안했다. 동업 제의를 받을 정도로 자기 가게처럼 일하며 요리를 포함해 식당 운영에 대한 전반을 익혔다. 그리고 2011년 말, 자본금 5,000만 원으로 자신의 첫 번째 식당 '키친 다이어리'를 오픈했다. "테이블 3개짜리 작은 공간에 간판도 없었어요. 아침마다 칠판에다 제가 팔고 싶은 메뉴를 적었죠."

돈가스, 우동, 파스타 등 그때그때 만들고 싶은 요리를 만들어내는 작은 식당이지만 그의 요리 철학은 확고했다. 냉동 등심 대신 그날 아침에 도축한 돼지고기를, 삶아둔 면 대신 주문이 들어올 때마다 생면 파스타를 그때그때 만들어냈다.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가 찬밥을 안 먹였어요. 무조건 새로 밥을 해서 주셨거든요. 가장 방금 만든 음식만큼 맛있는 건 없다는 걸 그때 배웠죠."

당시만 해도 광주에 창의적인 요리를 선보이는 양식당이 많지 않던 때라 '키친 다이어리'는 연일 문전성시를 이뤘다. 공 셰프는 그러나 초기의 성공에 도취하며 안주하지 않았다. 요리를 독학하며 저변을 넓혀 갔다. 그러다 우연한 계기에 프랑스 유명 셰프인 알랭 뒤카스의 요리책을 접하고는 자신의 길을 정했다. "프랑스 요리를 처음 봤을 때 이걸 해야겠다 확신이 들었어요. 정제된 구조와 절제된 색감, 감성적인 플레이팅에 매료됐죠."

■ 지역 식재료를 프렌치 조리법으로

공 셰프는 2013년 프렌치 레스토랑 '알랭'을 오픈했다. 이후 주기적으로 프랑스 파리를 오가며 다양한 프렌치 요리를 경험하고, 피에르 상 등 미슐랭 셰프들과 교류하며 자신만의 프렌치 요리 세계를 구축했다. 지역에 흔하지 않은 콘셉트의 레스토랑이라 영업은 성업했지만, 새로운 요리를 구상할 때마다 식재료 수급이라는 한계에 부딪혔다. 대다수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이 서울에 몰려 있고, 서울에 비해 지역의 수요가 적다 보니 유통망이 한정적인 게 문제였다. 전국 곳곳을 수소문해 요리에 필요한 식재료를 직접 공급받기에 열을 올렸는데, 경남 의령의 메추리는 그가 발굴한 대표적인 식재료다. 식용보다는 한약 재료로 사육하던 농가에 찾아가 육용으로 사육해 달라고 부탁했고 지금은 서울의 유명 프렌치 다이닝에서도 찾아 쓰는 식재료가 됐다.

프렌치 요리하면 대표적으로 언급되는 달팽이 요리, 에스카르고도 처음에는 농원에서 달팽이를 구해다 썼지만 어느 순간 자연스럽지 않다고 느꼈다. "굳이 프렌치 재료를 찾을 필요가 있을까 생각이 들었어요. 진도 같은 데 가면 뿔소라가 정말 좋거든요." 그는 억지스럽게 재료를 구해 프렌치 요리를 똑같이 구현하려고 하기보다 전남과 인근 지역에서 구할 수 있는 식재료를 프렌치 조리법으로 해석하는 방향으로 접근법을 바꾸기 시작했다. 그가 추구하는 '전라도 프렌치'다.

■ "화려한 맛보다는 재료 본연의 맛에 집중"


그의 요리도, 철학도 10년이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화해 왔다. 이제는 테크닉을 이용해 화려한 맛을 내기보다는 재료 본연의 맛을 최대한 살리는 방향으로 요리한다. 그가 좋아하는 프랑스 내추럴 와인 메이커들과의 만남이 결정적 계기가 됐다. "예전에는 제 요리에 '뭘 해야지'라는 게 많았어요. 프렌치 테크닉을 완벽히 해내 인정받고 싶었죠. 그러다 내추럴 생산자들을 만났는데 완벽한 걸 만들어야 한다는 집착보다는 '나는 그냥 이 정도만 하고 싶어'라는 마인드가 참 예쁘게 느껴졌어요. 내가 키운 포도가 가지고 있는 맛을 보여주고 싶지 그 이상을 원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최근엔 채소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요리도 보다 자연친화적으로 변모했다. 단골 손님 중 한 명이 채소로 코스 요리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을 한 게 계기였다. 고기를 쓰지 않고도 그만한 가격의 가치를 줘야 한다는 고민이 그를 다시 전국의 농장으로 이끌었다. 그 여정의 끝에서 만난 건 한국 유명 셰프들이 식재료를 공급받는 '준혁이네 농장'이었다. "토마토, 딸기, 루꼴라를 한 입 맛봤는데 기절하는 줄 알았어요. 내가 여태 먹은 채소들은 뭐였을까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죠." 그날부터 그는 일주일에 두세 번, 광주에서 왕복 10시간을 달려 경기 남양주의 농장을 오간다. 새벽 2시에 도착해 1시간 수확하고 다시 돌아오는 여정을 4년째 이어가고 있다.

이제 그의 메뉴는 늘 채소와 허브의 시즌에 맞춰 구성된다. 딜 꽃이 피면 복숭아와 함께 타르트에 올리고, 고수 꽃이 필 때는 전복과 조합한다. 참소라로 만든 에스카르고, 의령 메추리로 만든 구이요리, 남해 마늘을 넣어 만든 부야베스. 그의 요리는 전라도의 땅과 바다가 프렌치 테크닉과 만나 새로운 조화를 이뤄낸다.

그를 12년간 광주에서 버티게 해준 것은 무엇일까? "처음엔 프렌치를 이해 못하는 손님들 때문에 힘들기도 했죠. 그런데 하다 보니 나를 뽐내며 사람들이 이해해 주길 바라는 것보다 지역 사람들과 진정으로 소통하며 그들에게 필요한 식당이 되는 게 먼저였다는 걸 깨달았어요." 주변을 품으며 스스로 변방이 아니라 지역의 중심이 되어가는 것, 그것이 지역에 뿌리내린 요리사의 자세이자 마음가짐이었다.
법대 출신 고시생→생계형 셰프의 ‘전라도 프렌치’

알랭’의 농어 부야베스(프랑스식 해물 스튜). [장준우 제공]


법대 출신 고시생→생계형 셰프의 ‘전라도 프렌치’

경남 의령 농장에서 공급 받은 메추리로 만든 ‘알랭’의 메추리 구이. [장준우 제공]


법대 출신 고시생→생계형 셰프의 ‘전라도 프렌치’

‘알랭’의 메론 소르베. [장준우 제공]



<장준우 셰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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