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치매환자가 된 친구, K를 바라보며

2025-07-09 (수) 08:05:36 김 발렌티나 페어팩스,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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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를 앓는 노인이 스스로 치매라는 사실을 잊는 경우가 있다. 치매는 단순한 기억력 저하가 아니라 다양한 인지 기능의 장애를 일으키며, 그로 인해 자신이 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부정하기도 한다. 특히 초기에는 본인이 치매라는 것을 전혀 자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치매’라는 단어가 무색할 정도로, 이 병은 증상이 다양하고 복합적이다. 소화가 되지 않으면 소화제를 먹듯,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 병이 아니다. 치매는 하나의 단일 질병이 아니라 기억력, 사고력, 판단력 등 여러 인지 기능이 점차 저하되어 일상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는 증후군이다.

치매 환자의 변화는 점진적으로 나타나며, 인지·정서·행동적 측면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표현된다. 이러한 변화는 치매의 단계(초기, 중기, 말기)에 따라 달라지고, 환자마다 그 양상도 다르게 나타난다.
그동안 살아온 삶의 여정이 여지없이 사라지고, 다시는 예전의 모습을 찾을 수 없게 되는 현실은 그저 안타깝기만 하다.


코로나 이후, 어느새 우리 모두는 자연스럽게 ‘할머니’로 불리게 되었다.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라는 질문이 낯설지 않게 들릴 만큼, 세월은 조용하지만 거침없이 우리를 젊음의 세계에서 노인의 세계로 이끌고 있다.

노인들은 아프다. 치매도, 외로움도, 쓸쓸한 일상도 모두 우리의 이야기다. 특히 치매를 앓는 이들 중에는 너무나 점잖고, 예의 바른 분들이 많다.
K 선생님. 아줌마, Mrs. Kim으로도 불렸던 그분은 나와 반세기를 함께 살아온 친구이자 벗이다. 삶의 굴곡을 함께 지나며 쌓아온 수많은 사건과 시간이 우리를 형제처럼 가깝게 만들었다.

그는 여러 단체의 장을 맡으며 오랫동안 활발한 사회 활동을 해온 저명인사였다. 대규모 회의를 주도하고, 필요한 곳에는 아낌없이 투자하는 통 큰 어르신이었다. 스스로는 아직 치매 환자가 아니라고, 매사에 감사하며 살아가셨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는 직접 운전하며 모임에 참여했고, 대중 앞에 서는 일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나타난 낯선 언행과 돌발적인 행동은 우리 모두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너는 나의 백년 친구야." 함께 외출할 때마다 그렇게 말하며 고마워하셨지만, 그 표정 속에는 어딘가 모를 쓸쓸함이 스며 있었다. 그의 인격과 존재감이 점점 흐려져 가는 모습을 보며, 나의 마음도 아프고 슬퍼졌다.

K 선생의 이 힘겨운 여정은 언젠가 우리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길이다. 나는 그분의 예전 모습을 기억하고 싶다. 예쁘고, 인심 좋고, 에너지가 넘치던 그 시절. 그가 있는 곳에는 늘 풍부한 인심과 넘치는 이야기가 꽃을 피웠다.
그의 모습이 더 망가지기 전에, 다시 그를 현실로 돌아오게 할 특별한 묘약이 나오기를, 나는 간절히 기도한다.

이제 그는 점점 자신의 세계 안에 머무르며, 대화에서 단절되고, 사라져 가는 기억을 끌어안으며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애쓴다.
“나는 요즘 많은 걸 잊어버립니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 밥을 먹었는지도 가물가물해요. 때로는 눈앞에 있는 당신조차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어요."
그럴 때마다 그는 혼란스러워하고, 미안해하고, 두려워한다. 그러나 마음 깊은 곳에는 여전히 우리가 있다.

“당신의 따뜻한 손길, 부드러운 목소리, 함께 웃었던 기억들. 머릿속에서는 흐릿해져 가지만, 내 가슴속에는 또렷하게 남아 있어요. 내가 이상한 말을 하더라도, 화를 내더라도, 그건 병 때문이지, 진심이 아니라는 걸 알아주세요. 나는 여전히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당신이 내 곁에 있어 줘서 정말 고마워요."
흐려져 가는 기억 속에서도, 지난 삶의 기쁨과 자신의 존재를 기억하려는 그의 의지는 아직 꺼지지 않았다.

나는 기도드린다. 하느님의 시선이 그의 아픈 마음 안에 늘 함께 머물기를. 불확실한 미래 속에서도, 조용하고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하느님은 말씀하신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아라.”

<김 발렌티나 페어팩스,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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