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에세이] 말할 수 없는 비밀에 대하여
2025-07-09 (수) 12:00:00
임지영 (주)즐거운 예감 한점 갤러리 대표
비밀이 있었다. 깊은데 넣어두고 오래 지켰더니 어느새 잊혀졌다. 비밀이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닌 게 되었다. 비밀의 속성은 현재성에 있는 것 같다. 탄로났을 때의 타격, 발각됐을 때의 충격, 모두 현재의 삶을 크고 작게 위협하므로. 아마 10년 후에 밝혀진다면 타격감이 지금처럼 크진 않을 것이다. 물론 평생 튀어나오면 안되는 비밀도 있는데 아마도 그것은 죄에 가까울 것이다.
엄마는 비밀을 공공연하게 말해버렸다. 나는 너네 아빠랑 결혼할 게 아니었어.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거든. 중요한 건 이미 아빠도 다 알고 결혼한터였다. 지독한 사랑의 시작. 그렇게 부부가 되고 부모가 된 후에도 애증을 멈추지 않았다. 사랑만큼 악착같이 따라붙는 불안. 불균형한 사랑은 어린 것들에게는 공포였다. 툭하면 먼데를 보던 엄마, 여길 떠나버릴거야 말하던 엄마, 그럴수록 집착하던 아빠, 아무데도 못가게 옥죄던 아빠.
사랑을 지긋지긋해했다. 사랑이 주는 좋은 것보다 나쁜 것을 먼저 알았다. 사랑은 외롭고 불안하고 조마조마한 외줄타기 같았다. 엄마가 동창 모임이라도 나가는 날은 언제나 극도의 긴장이 맴돌았다. 어떤 사랑은 마음의 병이다. 물론 평온하고 사랑 넘치는 일상이 다반사였다. 누가 봐도 부러운 지적이고 아름다운 부모와 꼭 닮은 딸 셋 조로록. 하지만 삶은 취약한 것 하나가 장점 열가지를 덮는다. 손가락에 박힌 가시 하나가 내 정신을 무너뜨린다. 그래서 결심했었다. 사랑 따위, 그깟 사랑 따위 나는 안할란다.
허나 사랑도 하고 결혼도 했다.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고 다짐해놓고 비슷하게 살기도 했다. 그리고 살아보니 모든 사랑에 편한 길은 없었다. 사랑이란 게 본디 안간힘을 쓰는 일. 그 힘들고 어려운 걸 해보겠다고 기를 쓰는 일이었다. 사랑 그 놈 참. 엄마가 몇년째 아프고 많이 약해지셨다. 먼데는 커녕 한 발 딛는 일도 조심스럽다. 엄마는 십수년전 돌아가신 아빠에게 아직도 미안해하신다. 두분은 다정하게 함께 다녔지만 가슴 한켠에 지옥을 나눠 갖고 있었다.
다시 비밀 이야기. SNS로 우리는 탄로 사회를 산다. 사람 하나 붕 뜨는 것도 쉽고 훅 가는 것도 쉽다. 하지만 사는 동안 양명한 평지만을 걸을 수는 없을터. 주먹만한 우박도 맞고, 시커먼 진창에 한쪽 발도 빠질터. 산전 수전 공중전을 거치며 성장이란 걸 하고도 죽을 때까지 흔들리며 나아가는 존재가 나일 터, 당신일 터, 우리일 터. 그러므로 비밀이 있다면, 안다면, 지켜주면 좋겠다. 치명적으로 유해한 것이 아니라면 나만 아는 삶의 비밀, 은근하고 그윽하잖아. 다정한 무관심은 배려고 말고. 나는 지켜야 할 비밀이 있는 삶이 좋다. 혼자서도 배시시 싱긋 웃을 수 있는 여든아홉가지 이야기가 있다는 것은 참말로 재밌는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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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지영 (주)즐거운 예감 한점 갤러리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