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두 도시 이야기: 리우와 부에노스, 남미의 심장들이 말하다

2025-06-05 (목) 04:59:13 제프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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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프 안의 오세아니아 여행기

두 도시 이야기: 리우와 부에노스, 남미의 심장들이 말하다

케이블카에서 내려다본 리우데자네이루의 전경.

“최고의 시대였고, 최악의 시대였다….”

찰스 디킨스가 ‘두 도시 이야기’에서 런던과 파리를 묘사했던 이 문장은, 남미의 두 대도시 리우데자네이루와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설명하는 데도 전혀 손색이 없다. 제프는 이 두 도시를 네 번씩 방문하며, 매번 그 대조와 닮음에 새삼 놀랐다.
 
리우-빛과 축제, 바다의 도시

리우(Rio de Janeiro)는 자연이 만들어낸 예술품이다. 산과 바다가 삼바 춤추듯 이토록 가까이 있는 도시는 드물다. 구름을 뚫고 솟아오른 슈가로프산과 예수상, 그리고 끝없이 이어지는 코파카바나 해변과 파도는 그 자체로 경외다. 해변에는 이른 아침에도 배구와 축구를 즐기는 모습이 활기차고 호텔과 식당가는 마치  마이애미 같다. 


한참 보도를 따라 걸어가면 곧바로 이파네마 해변으로 연결된다. 이곳은 예술가, 지식인, 부유층이 선호해서 조용하고 세련된 모습이다. 나지막한 아트대코 건물들이 사우스 비치를 연상시킨다. 패션 부티크, 갤러리, 아트카페에서 모히토 한잔 후 선선한 바람이 부는 해변산책을 하다 보면 재즈풍 ‘이파네마의 여인(Girl from Ipanema)’이 콧노래로 절로 나온다. 이 곡의 영감이었던 17세 소녀와 같은 수많은 뮤즈들이 해변가에서 카립소(Calypso) 물결을 이루며 젊음을 발산한다. 그들 뒤로 ‘두 형제 봉우리’ 너머로 지는 해는 장관이다. 
 
산정상 카페에서 맛본 맥주 맛과 최상의 풍경

리우의 상징 ‘구세주 그리스도상’은 이들의 정체성과 신앙, 도시의 품격을 압축한 상징이다. 710M 산 정상에 38m 높이의 철근 콘크리트 상은 1931년 이후 우리에게 자비와 포용을 전한다. 동심으로 산으로 올라가는 페니큐라 기차(그리스도 상)와 케이블카 탑승(슈가로프 산)도 즐거움을 배로 상승시킨다. 특히 산 정상에서의 자유시간에 예수상 뒤편 90도 절벽 위에 위치한 기막히도록 로맨틱한 카페에서 시원한 맥주 한 잔을 들이키며 바라본 와이프의 행복한 표정은 말이 필요 없다(priceless). 아마도 영원히 내 눈과 가슴에 살아 있으리라 믿는다.  

여기에 더해, 세계적으로 유명한 리우 카니발은 도시 전체가 리듬과 열정에 휩싸이는 축제다. 삼바는 심장박동이며, 하나의 거대한 드럼이다. 이들은 축제를 위해 한 해를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겉보기의 아름다움과 달리, 슬럼가의 현실도 존재한다.‘최고의 시대’와 ‘최악의 시대’가공존하는 도시의 이중성이다. 강심장 제프도 묵었던 코파카바나 해변 힐튼호텔 주위를 맴돌 뿐, 달동네를 걷는다는 것은 감히 상상도 못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유럽적 품격, 정열의 도시

부에노스아이레스는 ‘남미의 파리’라는 수식어가 전혀 과하지 않다. 이 도시에는 정제된 유럽적 분위기와 탱고의 정열이 동시에 흐른다. 밤의 거리에서 들려오는 음색은 관능적이며 슬프다. 콜론 극장, 레콜레타 묘지, 산 텔모 거리는 역사와 문화, 예술이 살아 있는 공간이라 하지만 도시 외곽의 회색빛 빈민촌과 페소화의 불안정한 가치, 반복되는 정치적 혼란은 또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그리고 해변은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다. 리우가 짙푸른 바다의 축복을 받았다면,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해안은 흙탕물 색의 강일 뿐, 누구도 그곳에서 수영복을 입지 않는다.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도심의 아름다운 백옥 대리석 건물들이 무색하리만큼 강물은 진흙물이다.
 
축구-마라도나와 펠레, 메시와 네이마르

두 도시는 축구에서도 치열한 영혼의 라이벌이다. 브라질은 펠레와 네이마르, 아르헨티나는 마라도나와 메시. 단순한 스포츠를 넘어, 국민정체성과 자존심의 대리전이다. 월드컵은 브라질이 5번, 아르헨티나가 3번 우승했다. 브라질인들에게 아르헨티나에 대해 질문하면 “아르헨티나? 누구?” 하며 되묻는다. 아주 무시하겠다는 뜻이다. 반면 브라질에서 아르헨티나 국경을 넘을 때는 국경 심사가 유독 까다롭다. 브라질인들의 불법 이민을 막겠다는 이유이지만, 제프에게는 신경전으로 보인다. 이곳 사람들에게 축구는 종교다. 어린이들이 거리에서 공을 차며 외치는 이름들이 바로 그 나라의 ‘신’이다. 마치 제프가 마이클 조던과 칼 립켄 주니어, 조 따이스맨의 경기를 직관했던 경험처럼, 이들에게 축구선수는 올림포스의 신들과도 같다.
 
문화, 언어, 정체성-닮은 듯 다른 영혼

브라질은 포르투갈어를 사용하는 유일한 남미 국가다. 흑인 문화와 삼바, 예술혼이 살아 있다. 혼혈 아이들이 무척 예쁘다. 반면 아르헨티나는 대부분이 이탈리아계 백인 후손들로, 언어는 스페인어이되 강한 억양을 지녔다. 뿐만 아니라 백인 우월주의 사상이 전면에 깔려 있다. 나치전범들이 브라질이 아닌 아르헨티나로 피신했던 이유도 거기에 있다. 도시의 표정도, 사람들의 눈빛도, 살아가는 리듬도 서로 다르다. 제프는 두 도시 모두 좋다. 어느 하나를 선택하기란 마치 “너는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 하고 묻는 우문과도 같다. 따라서 남미 여행에서 두 도시는 실과 바늘처럼 항상 함께 붙어 다닌다.
 
한인의 삶과 흔적

한인사회는 이 두 도시에서도 온도차를 보인다. 상파울루에는 5만 명이 넘는 한인들이 뿌리를 내렸지만, 리우는 한인 거주가 드물다. 반면 부에노스아이레스는 ‘빌라 크레스포’ 지역을 중심으로 의류업 등에 종사하는 한인들이 다수 거주하고 있다. 택시를 타고 그곳으로 향했다. 한인교회가 여기저기 보여서 무조건 내렸다. 그런데 택시 기사가 우범지역이니 조심하라고 귀띔해준다. 한인 식당에 들어섰는데 강도가 심하다며 주인장이 뒤로 문을 걸어 잠근다. 우범지역에서 뼈가 굳어졌던 제프는 그 잠겨진 문고리를 바라보며 가슴이 ‘찡’해졌다. 그런 우범지역에도 보도 바닥에는, 누가 깔았을까? 한반도 지도가 선명히 각인되어 있다.
 
문학과 정치, 대립을 넘은 공존

브라질의 룰라 대통령, 아르헨티나의 페론, 리우 출신의 현대 작가 파울로 코엘료, 부에노스의 노벨문학상 수상자 보르헤스의 두 도시는 정치와 문학의 거장들을 배출했다. 리우는 감각적이고 직관적인 도시이고, 부에노스는 사색적이고 철학적인 도시다. 따라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책방을 가지고 있다. 전자는 가슴으로 말하고, 후자는 언어로 사유한다. 이 둘은 서로 다르다. 자연과 도시, 삼바와 탱고, 색채와 구조. 하지만 결국, 이질성 속의 조화, 경쟁 속의 공존이 바로 이 두 도시가 가지는 가장 인간적인 면모다. 각 도시가 제프에게 들려준 이야기는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자 그림자였다.
“그것은 최고의 여행이었고, 가장 인간적인 여행이었다.”

<제프 안: Jahn20@yahoo.com>

<제프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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