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재명 대통령 당선인이 걸어온 길
▶ 안동 출생… 초등교만 나와 공장 취업 전선
▶ 장애 딛고 중앙대 법대 졸… 인권 변호사로
▶ 성남시장·경기지사… 대장동 등 ‘사법리스크’
대한민국 제21대 대통령에 당선된 이재명(61)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이른바 ‘개천에서 용 난’ 스토리의 주인공이다. 그는 스스로를 ‘흙수저’도 아닌 ‘무수저’라고 할 만큼 철저한 가난을 딛고 일어서야 했다. 산골 출신 소년공으로 자라 정치권에서도 ‘변방 장수’로 이력을 채우다가 대권에 도전한 독특한 삶을 살아왔다. 더불어민주당 계열 정당에서 배출한 전·현직 대통령들(김대중·노무현·문재인)과 비슷한 비주류의 삶을 살았으면서도 더 비주류였던 다른 정치인의 길을 걸었다. 하지만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지난 1987년 직선제 개헌 이후 기초단체장·광역단체장·국회의원·당대표를 모두 경험한 첫 번째 대통령이 됐다.
■ 출생과 성장이재명 당선인은 1964년 경상북도 안동군 예안면의 깊은 산골에서 화전민 가정의 5남 2녀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그의 어린 시절은 ‘가난과의 싸움’이었다. 이 후보는 봄에 피는 진달래꽃을 먹으며 주린 배를 채워야 할 정도로 가난했고, 5㎞ 산길을 걸어야 갈 수 있었던 초등학교에는 자주 결석했다.
1976년 삼계초등학교 졸업 후 온 가족이 아버지가 일을 하던 경기 성남으로 올라가 터를 잡았다. 그는 성남시 상대원동에 있던 ‘동마고무’ 공장에서 소년공 생활을 시작했다. 나이가 어려 법적으로 취업이 불가능하자 취업이 가능한 동네 형님 이름을 빌려 위장 취업을 했다. 무려 6년 동안 ‘이름 없는’ 소년공으로 살았다.
시계공장에서 스프레이 작업을 하다가 후각이 상했고, 야구 글러브 공장에서는 프레스에 왼팔이 끼여 골절상을 당해 그 뒤로 구부러진 팔을 장애로 안고 살았다. 이로 인해 장애등급 판정을 받아 군대는 면제됐다. 공장 내 폭력에도 시달렸던 이 후보는 이런 삶에서 탈출하려면 고등학교 졸업 자격을 얻어 공장 관리자가 돼야 한다고 생각하고 검정고시에 도전했다.
가난과 굶주림 속에서 공장 생활을 하던 그의 꿈은 “남에게 쥐어 터지지 않는 것, 배불리 먹는 것, 자유롭게 다니는 것”이었다. 공장에서 본인을 괴롭히던 고졸 출신 대리처럼 간부가 되기 위해 공부를 시작했지만 아버지는 공부하는 것을 반대했다. 더구나 장애인이 된 본인 처지를 비관하며 열일곱 살 때 두 차례 자살까지 시도했다. 이후 우여곡절 끝에 1년여 만에 중고교 검정고시를 통과했다. 1980년 전두환 정권이 본고사를 폐지하고 학력고사만으로 대입 제도를 바꾼 것이 이 후보에게는 기회가 됐다. 그는 1982년 전액 장학금과 매달 생활비 30만 원을 지급하는 중앙대 법학과에 입학했다.
■ 성남서 인권변호사로대학 졸업 1년 후인 1986년에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사법연수원에서 동기로 만난 더불어민주당 정성호 의원과는 평생 정치 역정을 함께하는 동지가 됐다. 이 후보의 인생을 바꿔놓은 또 한 번의 계기는 노무현 전 대통령과의 만남이었다. 사법연수원 시절 노 전 대통령의 강의를 들으며 인권변호사의 길을 가기로 마음먹었다. 판·검사 경력 없이 변호사 사무실을 열면 생활비나 벌 수 있을지 고민했으나, 노 전 대통령이 “변호사는 뭘 해도 굶지는 않는다”고 해 용기를 냈다고 한다.
이재명 당선인은 성남에서 노동과 인권 사건 변호를 주로 맡았다. 소년공으로서 겪어야 했던 가혹한 노동 현장의 현실이 그가 노동 변호사와 시민운동가의 삶을 선택하는 근본적인 동기가 됐다. 이 후보는 스스로 “법조계에 ‘파견된 노동자’라고 생각하며 살았다”고 밝힌 바 있다. 성남시민모임을 만들어 2000년 분당 백궁·정자지구 용도 변경 특혜 의혹, 2002년 분당 파크뷰 특혜 분양 사건 의혹을 제기했다. 당시 성남시장과의 통화 녹취록을 공개하는 과정에서 공무원 자격 사칭 혐의로 구속됐다. 2004년 성남 구시가지 내 대형 병원들이 계속 문을 닫자 공공 의료원 설립을 목표로 주민 발의 조례를 만들었다. 당시 한나라당이 다수였던 성남시의회는 막강했다. 결국 시 의료원 설립안은 부결됐고, 이에 좌절한 그는 정치 입문을 결심했다.
■ 정계 입문이재명 당선인은 2006년 열린우리당에 입당해 성남시장 선거에 나섰지만 낙선했다. 2007년 대선에서는 당시 정동영 대통합민주신당 후보의 비서실 수석부실장을 맡는가 하면 2008년 18대 총선에서는 성남 분당갑에 출마했지만 떨어졌다. 2009~2010년 정세균 대표 체제에서 민주당 부대변인을 지내기도 했다. 2010년 성남시장에 당선된 그는 취임 직후 ‘성남 모라토리엄’을 선언하며 전국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2017년 “대한민국 최초의 노동자 출신 대통령이 되겠다”며 민주당 대선 경선에 나섰지만 문재인, 안희정에 이어 3위를 기록했다. 득표율은 21.2%였지만 단숨에 차기 대선 주자로 부상했다. 2018년 경기도지사 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 2022 대선 0.73%p 패배2021년 마침내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혈투 끝에 이낙연 후보를 물리치고 승리해 2022년 본선에 나설 수 있었다. 그러나 경선 과정에서 이낙연 후보 측이 제기한 대장동 개발 특혜 의혹은 끝내 본선에서 발목을 잡았고, 당시 윤석열 후보에게 대권을 내줬다. 윤 후보와의 득표율 차이는 0.73%포인트로 역대 대선 사상 최소 득표율 격차였다.
지난해 1월2일에는 부산 북항 방문 중 흉기에 목을 찔리는 정치 테러를 당했다. 응급수술을 받고 목숨을 건졌다. 이 후보는 “살인테러 미수 사건 이후 남은 생은 하늘이 준 덤으로 여기고 오직 국민과 나라를 위해 헌신하겠다고 말씀드렸다”며 “또 다른 칼날이 저를 향한다고 해도 결코 두려워하거나 피하지 않겠다”고 했다.
■ 사법리스크 논란이재명 당선인은 정치적 경력을 쌓아오는 과정에서 대장동 개발 특혜 의혹 등으로 각종 형사 재판에 휘말리는 ‘사법리스크’로 정치적 벼랑 끝에 내몰렸다. 경기도지사이던 2019년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2심에서 당선 무효형에 해당하는 벌금 300만원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이듬해 대법원에서 무죄로 뒤집혔다. 대법관 의견이 7(무죄) 대 5(유죄)로 나뉠 정도로 아슬아슬했다. 2023년 9월엔 이 대통령에 대한 국회 체포 동의안 표결에서 ‘민주당 반란표’가 나오며 가결됐지만, 법원에서 구속영장이 기각됐다. 이재명 당선인은 최근까지 형사 재판 5개를 받아 왔다. 지난달 1일엔 대법원에서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이 유죄 취지로 파기환송됐지만 형이 확정되기 전에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논란의 여지를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