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상의 섬, 마추픽추: 성역인가 피난처인가?

은색 구름이 산봉우리와 계곡을 병풍같이 둘러쌓다.
일본의 국민작가인 나쓰메 소세키는 “노년이란 몸이 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갈망하던 것을 잃는 것”이라고 노년에 대한 통찰을 피력했다. 나는 마음이 갈망하던 것을 잃지 않기 위해 마추픽추행 기차에 올랐다.
마추픽추와 내셔널 지오그래픽
마추픽추를 처음 접한 것은 어린 시절, 아버님이 건네 주신 「National Geographic」 잡지였다. 영어는 읽을 수 없었으나,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펼쳐지는 머나먼 곳의 이국적 사진들은, 답답한 집과 교실, 학원을 오가던 나에게 묘한 해방감을 주었다. 미국으로 이주한 후에는 그 잡지를 매달 받아 보기도 했지만, 어린 시절 느꼈던 흥분은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탄성을 자아낸 잉카 트레일 기차
이른 아침, 가랑비가 날릴 때 젖은 기차 플랫폼에서 기차에 탑승했는데, 생각보다 청결했다. 구렁이처럼 흐르는 강과 성당의 촛대 같은 산봉우리들. 우루밤바에서 마추픽추의 아랫동네인 ‘아구아스 칼리엔테스(뜨거운 물)’까지는 약 2시간이 소요되는데, 구불구불 휘어진 우루밤바 강의 황토색 급류는 장관이었고, 끊임없이 등장하는 날카롭고 신비로운 산봉우리들 덕에 탄식이 절로 나왔다.
객실 칸 사이를 오가며 잉카 복장을 한 승무원들이 노래와 춤을 선보였지만, 흥미로웠을 뿐, 무표정한 젊은 승무원들처럼 큰 의미를 느낄 수는 없었다. 기차는 어느새 한국 기차처럼 변해 있었다. 우리는 때때로 중국인이나 베트남인들이 시끄럽다고 흉을 보기도 하지만, 흥분한 한인 아주머니들도 전혀 만만치 않았다. 기차 구석구석에 앉은 미국 부부들과 현지인들은 조용히 창밖의 경이로운 풍경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가랑비 속을 질주하는 기차는 강 속을 달리는 급류와 경쟁하듯, 터널과 다리를 오가며 달렸다. 마추픽추에 오르기 전까지, 페루 산맥의 깊고도 숭고해 보이는 젖은 무덤 같은 풍경은 무언가를 숨기려는 듯, 나를 더 깊은 오지로 끌어들이고 있었다.
비운의 역사
1492년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1532년 피사로의 잉카 정복, 1533년 잉카 수도 쿠스코 함락, 1542년 페루 총독제 실시, 1821년 페루 독립 선언, 1911년 하이럼 빙엄 예일대 교수의 마추픽추 발견, 1913년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마추픽추 특집 발간, 2000년 후지모리 하야와 일본 망명 등으로 이어진 비운의 페루 역사는 기차 창에 뿌려지는 빗물처럼 묵묵히 흘러내렸다.
먼로 독트린과 미국의 미주 대륙 헤게모니
신생 강국으로 성장한 미국은 1823년 먼로 독트린을 선언하며 “유럽은 미주 대륙에 개입하지 말라. 미주는 미국이 책임진다”고 공표, 미주 전체를 미국의 영향권(sphere of influence)으로 설정했다. 이후 1898년 쿠바, 1903년 파나마에 개입하고, 1904년 루즈벨트의 추가 선언에서는 미국이 ‘국제경찰’임을 자처하며 광범위한 개입 논리를 확장시켰다. 냉전 시대에는 ‘미주 민주주의’와 ‘안보 유지’ 명분으로 미주기구(OAS)를 워싱턴 D.C.에 설립했다. 이러한 미국의 독주에 반발한 국가들은 베네수엘라, 쿠바, 니카라과 등이었으며, 트럼프 대통령의 “캐나다는 미국의 51번째 주” 발언, 파나마 병합론, 그린란드 흡수 계획 등은 모두 먼로 독트린 이후 미국이 추구해 온 강력한 헤게모니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빙엄 교수의 마추픽추 발견과 오류
세계 고대사는 유럽 학자들에 의해 발굴되었지만, 미주 대륙에서는 미국 학자들의 고고학적 성과가 두드러진다. 1911년, 빙엄은 정글과 깊은 산맥 속에 방치되어 있던 ‘천상의 라퓨타’ 마추픽추를 현지인들의 도움으로 재발견한다. 그는 1850년대 영국인 헨리 레이야드(니네베, 아시리아 유적), 1873~76년 독일인 하인리히 슐리만(미케네와 트로이 유적), 1900년 영국인 아서 에반스(미노아 문명), 1922년 하워드 카터(투탕카멘 왕릉)처럼, 마추픽추를 스스로 발굴하고 해석하며 수많은 유물을 예일대로 반출했다.

(왼쪽부터) 산 위에 쌓아 올린 수많은 돌담들은 얼마만큼의 땀을 소모했을까. / 잉카 트레일 기차역에 마중 나온 잉카의 후예들. /‘뜨거운 물’ 시내에 흐르는 냇물과 구름다리 양옆으로 식당과 상점들이 즐비하다.
“나에게 영웅을 보여주면, 나는 비극을 보여주겠다.” - F. 스콧 피츠제럴드
인류사의 중대사가 대개 그러했듯, 마추픽추의 발견도 우연이었다. 그는 잉카 문명의 마지막 수도 ‘빌카밤바’를 찾기 위해 예일대와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지원을 받아 안데스 탐험에 나섰고, 1911년 7월 24일, 11살 지역 소년의 안내로 ‘잊힌 도시’ 마추픽추에 도달한다. 그는 이곳을 “자연과 인간이 이룬 가장 장엄한 조화”라고 극찬했다. (참고로 영화 인디애나 존스: 레이더스의 주인공 모델이 바로 빙엄 교수다.)
빙엄은 마추픽추를 잉카 황족의 성스러운 휴양지로 규정했고, 그의 주장은 곧 전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된다. 내 알마 마터인 조지 워싱턴대학교의 고고학 교수님은 강의 중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실과 전설이 충돌하면, 대중은 전설을 택한다.” 빙엄 교수는 고고학자였음에도 전설을 창조했다. 그 이유를 나는 나름대로 설명하고 싶다.
기차에서 관광버스, 그리고 마추픽추 전용버스로
기차에서 내려 ‘뜨거운 물’이라 불리는 아구아스 칼리엔테스를 둘러본 후, 마추픽추로 오르는 전용버스에 올랐다. 비포장 도로는 급경사와 8자형 커브, 물안개 낀 계곡은 발아래로 아득히 펼쳐졌다. 곳곳에선 작은 폭포가 떨어지고, 간혹 배낭을 멘 젊은이들이 45~60도에 달하는 경사의 트레일을 빗속에서도 묵묵히 오른다. 약 1,600개의 계단, 400m 급상승, 전망대도 음수대도 없는 험한 정글 속 바위길을 오르는 그들의 모습이, 땀에 젖어 있음에도 참 부러웠다.
버스에서 내려 매표소를 지나자 돌계단이 우리를 맞이했다.
“제프, 젊음이 부럽다며? 한번 해봐.” 누군가 그렇게 말하듯 내 마음을 다잡았다. 잘 정비된 돌계단을 오르다 한 번 우회전을 하자, 수만 번 보아왔던, 아니 어릴 적 아버님이 주셨던 바로 그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모습이 눈앞에 펼쳐졌다.
감격이란 이런 것
평생 잡지, 신문에서 보아왔던 그 장면을 내가 직접 체험하는 순간의 감격은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미끄러운 돌계단에서 아내의 손을 잡아주는데 손이 차갑다. 마추픽추는 해발 2,430m(7,970피트). 고산병 증상도 조심해야 하며, 정글 속임에도 불구하고 쌀쌀한 날씨다. 급경사 산 위에 조성된 다단계 농업 시스템과 수로는 실로 놀라웠다. 수많은 돌담과 신전, 제단, 그리고 성스러운 바위들 사이를 걷다 보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여행을 하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하지만 그들은 문자를 남기지 않았다. 기록이 없다는 이유로 서양인들은 그들을 ‘야만’으로 간주했다. 기록이 없으면 해석은 자유다.
빙엄교수의 주장과 제프의 해석
빙엄 교수는 마추픽추가 잉카 최후의 도시 ‘빌카밤바’이자, 왕족 전용의 종교 휴양지라고 주장했다. 둘러보면 꽤 그럴듯한 주장이다. 그러나 만약 내가 왕이었다면, 이곳을 휴양지로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험난한 바위길과 정글을 왕족이 굳이 올라올 이유가 있을까? 더구나 이곳엔 왕의 궁전이라 불릴만한 특출한 건물도 없다. 그가 발굴한 유적에서도 왕족이 사용했다는 결정적 증거물은 없다.
그렇다면 결론은 간단하다. 이곳은 휴양지나 성역(sanctuary)이 아니라 피난처였다고 보는 편이 합리적이다. 잉카 제국 내 경쟁에서 밀려난 부족이나, 스페인 침략자들을 피해 세운 ‘필살기’였다. 그러나 더 이상 머물 필요가 없어지자 모두 떠났고, 마추픽추는 ‘잊힌 도시’가 되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나의 해석은 빙엄 교수나 잡지사 그리고 미국 고고학계에게는 전혀 매력적인 주장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천상에 부는 바람, 그리고 마지막 인사
왕의 휴양지라 불릴 만한 산정상의 공기는 청정했고, 절벽 아래 굽이쳐 흐르는 강물은 장엄했으며, 강 너머로 솟아오른 봉우리는 잉카 제국의 상징이자 자존심처럼 보였다. 두 손을 잡고 걷는 사이, 아내의 손에 온기가 돌아왔다.
하산할 시간이 되어 아쉬움이 온몸으로 스며든다. 천천히 한 걸음씩 내려가는데, 천상에서 부는 바람 소리가 귓가에 스친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저 멀리 봉우리 사이로 비안개와 구름 속에서 은은한 은빛미소가 떠오른다.
아… 돌아가신 아버님인가?
가슴이 먹먹해 지며 눈가에 빗물이 맺힌다
뒤돌아보니 잉카인들이 숭배했다는 태양 신전이 높이 솟아 있다. 아침에 내리던 빗줄기가 멈추고, 은빛 구름 사이로 햇살이 내려온다. 가슴속으로 답했다.
“아버님… 빙엄 교수님…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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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프 안 AKI 연구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