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산불도 인종차별?

2025-04-16 (수)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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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타디나는 지난 1월 대규모 산불 때 LA에서 건물 피해가 가장 컸던 지역이다. 이튼 산불로 알타디나 일대의 건물 9,000채 이상이 소실됐다. 알타디나의 한인은 200여명(2020년 센서스)으로, 전체 주민 4만3,000여명에 비하면 극소수. 아시안도 많지 않다. 그렇다 보니 LA 살아도 알타디나가 어딘지 모르는 한인이 많다.

알타디나는 패사디나 바로 북쪽에 있다. 이름부터 패사디나에 빗대 명명됐다. 스페인어로 ‘알타(alta)’는 위쪽(upper)을 뜻하는데, 패사디나 위에 있다는 말일 뿐 특별한 뜻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두 지역에 같이 들어있는 ‘디나(dena)’는 인디언 말로 ‘밸리의 왕관’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알타디나는 지역 이름일 뿐, 독립 시가 아니므로 시 이름이 아니고, 카운티 직할지에 들어간다.

이런 알타디나는 산불 시즌마다 고위험 지역으로 꼽힌다. 바로 북쪽이 앤젤레스 국유림과 붙어 있기 때문이다. 주말 하이커들이 많이 찾는 이튼 계곡, 나즈막한 에코 마운틴이 바로 뒷산이다. 한인 하이커들이 많이 찾는 에코 마운틴은 그늘이 없어 여름 산행에는 적합치 않으나 3,000피트 좀 넘을 정도로 높지 않은데다, LA 한인타운과도 멀지 않다. 에코 마운틴까지는 한 때 기차가 운행돼 주민들의 휴양지 역할을 했다. 높아서 선선하고, LA동편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전망이 좋다.


이런 알타디나가 이번 화재로 17명이 숨지는 등 혹독한 피해를 입었다. 인종별로는 특히 흑인 주택 소유주들의 피해가 막심했다. 인근에서는 드물게 흑인 중산층 밀집지인 알타디나는 이번 산불로 흑인 소유 주택의 근 절반이 불에 탔다고 한다. 물론 백인, 라티노 등 타인종 주민도 산불 피해를 피해갈 수 없었으나 피해 주민을 인종별로 나누면 흑인의 피해율이 10% 이상 더 높아 “산불도 인종차별적”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알타디나 흑인 주민은 이 지역을 남북으로 잇는 간선도로인 레이크 애비뉴 서편에 모여 있다. 알타디나는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백합처럼 흰 동네’ . 20세기 초 백인을 위한 교외 지역으로 개발된 뒤 흑인 등 타인종의 유입을 허용하지 않는 배타적인 백인 동네로 유지됐다. 주택 소유주 협회를 중심으로 흑인, 라티노, 아시안에게는 주택 매매는 물론 렌트도 주지 못하게 규제했다.

이 같은 인종 분리는 2차 대전 후 대법원 판결로 금지됐으나 이 같은 관행은 계속됐다. 지난 1964년 흑인 가정이 처음 알타디나에 이주해 왔을 때 이를 지역 신문이 보도하고, ‘당신들을 환영하지 않는다’는 팻말이 나 붙을 정도였다.

이랬던 알타디나가 1970년대 한 때 주민의 3분의1이 흑인일 정도로 인종 분포가 급변했다. 직접 원인은 캘리포니아의 황금 시절, 텍사스 등 타주에서 흑인들이 대거 패사디나 인근에 이주해 왔다가 210번 프리웨이 신설, 도로망 확충 등으로 인한 재개발로 밀려 나면서 알타디나로 몰려 들었기 때문이다. 알타디나 흑인은 주택 소유주가 70% 이상일 정도로 중산층이어서 사우스 LA 등 타지역 흑인들과는 경제력에서 차이가 컸다. 하지만 이들은 주로 레이크 애비뉴 서쪽, 기존의 백인 주택가 반대편 쪽에 자리 잡았다.

상대적으로 더 작은 집을 다닥다닥 붙여 짓고, 건축 자재도 방화 기능이 없는 값싼 것을 썼다. 지난 번 이튼 산불 당시 마치 불화살처럼 핑핑 공중을 날아 다니는 불씨의 공습에 상대적으로 더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 LA 대화재는 가려져 있던 LA의 인종차별, 인종분리 역사를 새삼 떠오르게 했다. ‘흑인 집들도 중요하다(Black Homes Matter)’. 폐허로 변한 알타디나의 한 주택가에 세워져 있는 팻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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