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여행에서 돌아오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이 있다. “세계 어디를 가도 캘리포니아 같은 곳이 없다”는 것이다. 사철 화창한 날씨, 탁 트인 공간, 대기마저 한가롭게 숨 쉬는 자유로운 분위기… 캘리포니아의 태양이 선사하는 빛과 공간은 그 자체로 축복이요 예술이다.
이처럼 특별한 캘리포니아의 빛과 공간에 경도돼 불후의 작품을 남긴 작가들이 있다. ‘1966년과 LA의 빛’이라는 글에서 크리스틴 Y. 김 전 라크마(LACMA) 큐레이터는 제임스 터렐과 로버트 어윈, 리처드 디벤콘이 모두 1966년 LA에 터를 잡고 빛과 공간을 형상화하는 작업을 시작했다고 썼다. 그리고 바로 같은 시기에 샘 프랜시스와 데이빗 호크니도 캘리포니아의 빛과 공간을 캔버스에 쏟아넣으며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이제 현대미술계는 그 대열에 화가 안영일을 포함시키고 있다. LA카운티미술관(LACMA)에서 한국인 최초로 개인전을 연 고 안영일 화백은 자신의 ‘캘리포니아’ 연작에 대해 자서전(“오늘도 그림이 내게로 온다”)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1966년 미국에 처음 왔을 때 나는 캘리포니아라는 드넓은 공간과 밝은 태양, 자유로운 분위기에 단숨에 매혹됐다. 광활한 공간 앞에서 겸허해졌고, 무한한 신비와 아름다움을 체험하며 경외감에 사로잡혔다. 무엇보다 캘리포니아가 가진 풍요로운 색채의 스펙트럼은 화사한 팔레트의 유희를 만들어냈다. 붓이 저절로 춤을 추기 시작했고 자유롭게, 부드럽게, 때론 거칠게 선과 터치를 넣은 작품들이 계속해서 나왔다.”
1990년대 시작된 ‘캘리포니아’ 시리즈는 그 자유로움 때문에 작가가 특별히 사랑했던 연작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전시 기회를 얻지 못했는데, 이유는 ‘물의 화가’라는 명성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라크마 전시(2017-18)에서도, 롱비치 뮤지엄(2015, 2017)에서도, 루이스 스턴 갤러리(2019)와 하퍼 갤러리(2023)에서의 회고전도 모두 ‘물’(Water)이 주인공이었다.
그러나 이제 마침내 ‘캘리포니아’의 시대가 온 듯하다. 글로벌 갤러리 ‘페로탱’(Perrotin LA)에서 지난 11일 개막된 안영일 작품전(Young-Il Ahn: Selected Works 1986?2019)은 30여년에 걸친 작가의 여러 연작들을 소개하면서 하이라이트로 ‘캘리포니아’ 4점을 중앙에 걸었다.
전시를 기획한 제니퍼 킹 수석디렉터/큐레이터는 “안영일은 한국 출신이고 단색화작가로도 불리지만, 본질적으로는 LA에서 50년 넘게 살며 작업해온 캘리포니아 작가”라고 말했다. 그는 “자유롭고 느슨한 제스처가 돋보이는 ‘캘리포니아’ 연작은 이 공간, 태양, 대기에 대한 작가의 현상학적 경험에서 나온 작품들”이라면서 “1960년대 ‘빛과 공간’ 운동의 창시자 터렐과 어윈을 사로잡았던 바로 그 경험”이라고 설명했다.
10년간 라크마 현대미술부 큐레이터였던 제니 킹은 남가주에서 오래 활동했으나 덜 알려진 해외출신 작가들의 유산을 발굴하는 데 특별한 통찰력을 발휘하는 미술사가이기도 하다. 99세때 라크마에서 개인전을 가진 베네주엘라 출신의 루치타 우르타도(1920-2020), 잊혀진 일본계 미국작가 케이쇼 오카야마(1934-2018)를 세상에 드러낸 그녀가 지금은 ‘페로탱’에서 안영일(1934-2020)의 유산을 조명하는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페로탱은 세계 10대 갤러리에 꼽히는 화랑으로, 35년전 프랑스 파리에서 시작돼 지금은 홍콩 뉴욕 서울 도쿄 상하이 LA 런던 두바이 등 세계 9개 도시에서 12개 전시장을 운영하는 글로벌 갤러리다.
페로탱 LA는 2024년 초 한인타운에서 멀지 않은 피코 블러버드와 라브레아 인근의 유서 깊은 델마 디어터(Del Mar Theatre)를 세련되고 운치있는 전시장으로 개조하여 개관했으며, 곧바로 안영일 에스테이트와 5년 독점계약을 맺고 이번 전시를 마련했다.
앞으로 페로탱은 고인이 남긴 300여점의 보석같은 작품들을 세계 각지의 전시장에서 소개하면서 현대미술계에서 그가 마땅히 차지해야할 위상을 자리매김해줄 것으로 기대된다. 세계적인 아티스트 100여명을 대표하는 페로탱이지만, 타계한 작가의 전 유산을 관리하고 책임지는 전속계약은 매우 드문 일인 만큼 이 새로운 여정에 대한 열망과 기대감이 어느 때보다 높다. 아내 황영애씨를 비롯한 가족들은 물론, 근 40년간 고인의 화업을 기록해온 사람으로서 이보다 더 가슴 벅찬 사건은 만나기 힘들 것이다.
5월24일까지 계속되는 페로탱 LA의 안영일 작품전은 특별히 ‘빛과 공간’을 느끼게 하는 전시다. 제니 킹 큐레이터는 자연 채광이 내려오는 드넓은 공간에 단 17점만을 널찍널찍 디스플레이 함으로써 자신이 선별한 작품들에 대한 자신감을 보여주고 있다. ‘물’ 위주였던 과거의 전시들과 달리 그동안 거의 소개되지 않았던 다양한 주제의 작품들을 배치했다.
항구에 정박한 배의 모습을 그린 ‘하버’ 시리즈, 달리는 말과 기수가 역동적인 ‘경마’ 시리즈, 한글과 탈의 형태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들여다본 ‘자아성찰’(Self-Reflection)과 ‘탈’(Mask) 시리즈 등, 각각 구상적 형태가 보이는 초기작에서 완전한 추상으로 진화한 후기작을 나란히 보여주고 있다. 또 한편 이들과 구별된 공간에서 ‘물’ 시리즈도 5점 만날 수 있다.
<
정숙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