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경범죄’빌미 추방, 워싱턴 한인에 현실로 닥쳤다

2025-04-10 (목) 02:34:03 정영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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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워싱턴서 대학졸업 후 OPT 취업중 한인 K씨에 ‘5년전 난폭운전’ 이유 ICE “당장 미국 떠나라”

‘경범죄’빌미 추방, 워싱턴 한인에 현실로 닥쳤다

이민자 추방 정책 반대 시위에 참가한 고등학생들이 항의의 푯말을 들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가 불법이민자는 물론 합법 비자를 받고 체류 중인 유학생까지 비자를 취소해 대거 쫓아내는 추방의 광기 속에 워싱턴 지역의 한 청년이 5년 전의 난폭운전(reckless driving) 기록이 빌미가 돼 학생비자 취소 통보를 받았다.

20대 중반의 K씨는 지난 8일 국토안보부(DHS) 산하 이민세관단속국(ICE)으로부터 “여권에 있는 학생 비자 취소와 SEVIS(유학생 및 교환방문자 관리 시스템) I-20 입학 허가서가 취소됐다”며 유예기간 없이 “즉시 미국을 떠나라”는 날벼락 통보를 받았다.

고교 때 미국으로 유학 와 워싱턴 지역의 한 대학을 졸업한 후 OPT로 취업 중인 그는 대학 재학 때인 2020년에 난폭운전으로 경찰에 걸린 기록이 문제가 됐다. 현재 아무런 잘못도 없이 ICE의 일방적인 통보를 받은 K씨는 “학생 시절 스피드 오버로 난폭운전에 걸린 게 이토록 큰 죄가 될 줄 몰랐다. 앞으로 어떻게 할지 눈앞이 캄캄하다”고 망연자실해 했다.


K씨가 보내온 서류를 살핀 전종준 변호사는 “주마다 형사법 규정이 다를 수 있으며, 난폭운전이 경범 형사사건인데도 미국비자 취소 통보를 했다. 이제는 학생 비자 신분까지 취소하는 강경 반이민 정책을 펼치는 것 같다”고 진단했다.

이어 “통지문을 보면 한국에 간 뒤 미국 대사관에 가서 비자를 취소해야 하고 미국 재입국이 힘들다고 표기돼 있다. 미 대사관의 비자 거절이나 취소는 사법 심사의 대상이 아니다. 앞날이 창창한 젊은이의 인생이 망가지게 생겼다”고 안타까워 했다.

전 변호사는 “루비오 국무부 장관이 300여명의 학생 비자를 취소했다고 발표했듯이 음주 운전, 부부싸움, 간단한 교통 법규 위반으로 법원에서 지문을 찍은 경우만으로도 비자를 취소하고 내쫓고 있다”면서 “지상사 직원이나 교환 연수생 등 다른 종류의 비이민 비자로 미국에 체류중인 사람들의 비자 취소 및 체류 허가 취소 통보가 적용될 지 지켜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얼마 전에는 한 유학생 부부가 부부싸움을 하다 경찰에 리포트 된 후 법원의 기각(Dismiss) 선고를 받았음에도 학생 비자 취소 통보를 받기도 했다.

한편 미 CNN과 NBC 방송 등은 10일 트럼프 행정부 들어 뉴욕과 보스턴, 캘리포니아 등 미 전역의 22개 주에서 300명이 넘는 유학생 비자가 돌연 취소됐다고 보도했다.

트럼프 2기 행정부 초기에는 컬럼비아대에서 친팔레스타인 시위를 주도한 후 체포된 마흐무드 칼릴과 비슷한 사례가 많았는데, 최근에는 경범죄를 이유로 비자 취소와 함께 추방 위협을 받는 학생이 늘어나고 있으며 아무런 이유 없이 표적이 된 경우도 있다고 전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이런 유학생 비자 취소의 법적 근거를 1952년 제정된 이민·국적법에 두고 있는데, 이전까지 거의 사용되지 않은 해당 법 조항에 따르면 미 국무장관은 “미국에 잠재적으로 심각한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할 것으로 판단될 경우 시민권자가 아닌 사람을 추방할 수 있다.


국무부는 비자 취소 사유가 불분명한 사례들에 대한 NBC의 질의에 “개인정보 보호 문제 때문에 개별 비자에 대해서는 논의하지 않는다”며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국경을 보호하고 지역사회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매일 비자를 취소한다는 것”이라고 답했다.

컬럼비아대 로스쿨의 이민자 권리 클리닉 책임자인 엘로라 무커지는 당국의 표적이 된 대부분의 학생이 백인이 아닌 인종 배경을 지니고 있다면서 “현재 미국의 이민 정책은 외국인 혐오, 백인 우월주의, 인종주의에 의해 주도되는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CNN은 미 정부 보고서 등을 인용해 2023년 기준 미국 내 학생 비자 소지자는 150만여 명이며, 교환 방문 연구원 프로그램으로 체류 중인 인원은 약 30만 명이라고 전했다.

<정영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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