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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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우리집의 겨울

2025-01-21 (화) 08:06:00 한연성 포토맥,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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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이었던 우리 집은 마당이 있고 집안으로 들어가는 현관에서 대문까지 포도나무가 담을 따라 있었다.

아랫집과 나누어지는 담벼락엔 항아리가 모여 있었고(장독대라고 불렀다.) 항아리 뒤 담벼락에는 이웃집의 목련이 우리 집으로 넘어와 봄이 오는 시간을 향기로 알렸다.
장독대 옆으로 시멘트로 지어진 한 사람이 앉을만한 공간이 있었는데 그 자리는 내 사춘기의 묵상의 공간이 되곤 했다.

더 안으로 들어가면 재래식 화장실이 있었고 화장실을 둘러 넝쿨 장미(내 어린시절 5월은 장미로 인한 그리움이 있다.)가 무성히 자라고 있었다.
집 뒤에 공간에는 대추나무와 푸성귀 밭이 있어서 어릴 적 여름은 늘 상치와 열무 등으로 풍성한 끼니를 때웠다.


장독대 아래 조그마한 화단엔 어른 키만한 항아리가 묻혀 있었는데 그 항아리가 언제부터 그곳에 있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항아리 주변으로 맨드라미와 채송화, 봉숭아가 있었고 화려한 분꽃이 검은 눈동자를 만들고 있었다.

겨울이 다가오면 집 건물의 가장 마지막에 있는 광(스토리지 룸 같은)에 연탄이 쌓이고 그 곁에는 가을에 잘 익은 고구마를 삶아서 말린 꾸득한 겨울 간식인 고구마 말랭이가 벽에 풍성히 걸려있고 그 곁엔 아름드리 사이즈의 항아리가 있어서 설날에 만들었던 가래떡이 얼음이 덮여 하얗게 웃고 있었다. 쌀포대와 귀한 신문지에 쌓인 무와 생고구마도 늘 눈에 보였었다.

겨울 내내 나와 형제들, 연배가 비슷한 고모·삼촌들은 고구마와 가끔 운이 좋으면 뻥튀기로 배고픈 겨울 밤을 지내곤 했다.
떡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나에게는 가래떡은 그리 인기가 없었지만 고모와 삼촌들은 마루에 귀하게 놓인 난로에 구워 먹곤 했다.
4대가 함께 살던 우리 집에서는 음식이 많았지만 그렇다고 풍성하게 먹을 수 있었던 것도 아니다.

행동이 빠르지 못하면 고모나 삼촌들에게 다 뺏기고 울기가 십상이었다.
어릴 적부터 적자생존을 배웠고 행동에 민첩성을 배우지 않으면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할 수가 없었다.

동네 아줌마들이 모여 김장을 하면 봉투에 대여섯 포기씩 담아서 화단에 묻힌 항아리로 들어가면 김장이 끝이 난다.
우리 가족들에게 각자의 분담된 일이 있었는데 김장 김치를 꺼내 오는 일은 나의 차지였다.

비닐 봉투에 담긴 김치를 1주일에 적어도 2번을 마당, 화단에 가서 꺼내 와야 하는데 눈이 오고 추운 날은 그게 그렇게 힘든 일이었다.
겨울 해가 일찌감치 자취를 감추고 어둑하지만 아직은 사물이 보이는 시간에 화단에 다가서 하얗게 눈 덮힌 가마니를 들어내고 항아리 뚜껑을 열면서 들리지 않는 원망을 얼마나 했는지…

꽁꽁 얼은 가마니는 내가 열은 그 모양대로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고 항아리 뚜껑은 왜 그리 무거운지.
대여섯 포기를 품은 비닐봉지는 나를 항아리 안으로 끌어들일 정도로 무거웠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마저도 얼지 않아서 방구를 뀔 정도로 힘을 쓰면서 꺼낼 수가 있었다.


살 어름이 송송 김치 사이를 빛나게 하는 시원한 김치 맛은 아직도 잊을 수 가 없다.
연탄을 때던 때라 방마다 아궁이에 솥을 얹어 물을 데워서 아침에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았다.
겨울엔 늦게 일어나면 따뜻한 물로 세수를 하지 못하므로 기를 쓰고 먼저 일어나서 닦으려고 했었다.

돌아보면 전쟁과 같은 대가족의 집안이었지만 한국의 가족들을 만나면 밤을 새고 그 날의 시간들을 기억하고 웃는다.

다들 이제는 백발이 된 고모와 삼촌들, 그 중에 바쁜 사람은 벌써 하늘나라로 가고 없지만 겨울이면 보리와 섞인 밥을 시원한 김치와 먹던, 올빼미라 불릴 정도로 밤에 잠이 없었던 고모와 삼촌들과 그 긴 겨울 밤에 생 고구마 깎아서 먹고 라디오를 듣던 그 시간이 많이 그립다. 그렇게 긴 겨울이 지나면 아랫집 담장 너머로 목련이 하얀 미소로 우리를 반겼다.

이젠 도시개발로 그 집이 건물로 바뀌어서 홍대 앞 대학생들의 보금자리가 되었지만 나의 기억엔 아직도 마당의 수돗가에서 청바지를 빨던 푸릇한 그 옛날의 나의 집이다.

<한연성 포토맥,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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