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나면서 알아지는 생지(生知)와 배워서 알아지는 학지(學知), 애를 써서 알아지는 곤지(困知)가 있다고 한다. 종교의 믿음이 없이도 사람들은 상식의 이성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러나 사람들은 상대에 대한 대립의 감정도 지니고 있다. 나 자신도 자유롭지 못하다. 상식의 이성은 인류의 보편적 가치의 현상이며 당연한 권리이기도 하다.
반면 대립의 감정은 다른 콤플렉스로 인해 상주보다 곡(哭)쟁이가 더 슬피 우는 것처럼 본말이 뒤바뀌는 경우가 흔하다. 종교 간의 대립, 정치의 대립, 이념의 대립, 국가와 국가의 대립, 민족과 민족의 대립의 희생물은 언제나 힘없는 민중들인 국민들이었다.
모질게 희생을 당하면서도 풀처럼 자라는 그 국민의 뜻은 무엇일까? 정치인 모리배들의 단골 메뉴, 국민이라는 백성의 뜻을 물어 보면 뒤통수를 긁으며 멈칫거리기가 일쑤다. 1600년도에 살았던 허균은 그의 ‘호민론’에서 백성을 세 가지로 나뉘어 부르고 있다.
항민(恒民), 원민(怨民), 호민(豪民)이 그것이다. 원인을 생각지 못하여 부림만 당하는 항민, 위정자들에게 착취를 당해 한숨만 쉬고 행동하지 않는 원민, 위선의 정치에 반항하는 호민으로 나눈다.
항민이나 원민은 윤 정부의 내란에 저항을 안 하고 한숨만 쉬는 체념의 국민들이다. 여든 살에 첫 아이를 바라듯 국민들이 키운 민주주의가 하루아침에 내란 당의 총칼에 무너져도 저항 없이 바람 부는 대로 이리 저리 눕는 풀이 된다.
호민은 위정자들의 적이 된다. 상식과 이성으로 늘 깨어 있어서 불의에 저항하기 때문이다. 몇 백 년 전의 말이 정문일침(頂門一鍼)으로 되살아나는 현실은 애국이라는 가면을 쓴 국민의 힘 의원들과 윤 대통령의 쿠데타로 확연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윤 대통령이 말한 “광란의 칼춤" 은 워싱턴에도 있다. 광란의 굿판을 벌여 작두 위에서 칼춤을 추는 그들은 애국의 나팔을 불어대고 내란의 충복(忠僕)이 되어 “우리가 남이가" 식의 애국 성명서를 남발한다. 모 향군단체의 탄핵 반대 성명서는 국민들을 묶어 총살하여 백령도 바다에 버리라는 내란 세력에 적극 동조하는 내란 분자들임에 틀림이 없다. 교화시키기 어려운 동물이나 사람을 난화지물(難化之物)이라고 한다. 회장 및 그 동조 회원들은 스스로 난화지물의 울타리 속을 기어 들어갔다고 생각된다.
강물은 항상 넘실대며 흐르지만 불규칙하게 보이는 그 흐름이 바로 순리의 법칙이다. 국민들에게 총을 쏘라는 대통령의 명령이 “대한민국의 법치"가 된다면 대한민국의 법치로 탄핵을 했고 구속을 하면 참전 유공자들은 대한민국을 규탄해야 되지 않나? 우리가 아무리 오방잡처(五方雜處), 다시 말해 여러 사람이 섞여 사는 미국에 살지만 오방 잡놈이 되어서는 안 된다.
나이 값들을 하라. 이제는 근심할 일도 남보다 먼저 근심하고 즐거워 할 일은 나중에 즐겨도 될 인인(仁人)의 길을 걸어야 될 나이들이 아닌가? 그들이 남겨 놓은 아노미(Anomie) 현상의 우치(愚痴)는 먼 장래까지 조롱거리가 되겠다. 아노미 현상은 사회적 혼란으로 인해 규범이 무너지고 가치관이 붕괴 되면서 나타나는 사회적 개인적 불안정 병이다. 바로 지금 윤석열 정부 하의 한국 현실이다.
모 향군단체 지회장과 그 동조 회원들은 전쟁터의 사내들답게 나에게 사과를 해야 되지 않나? 월남 참전을 한 상이용사이지만 나는 참전 유공자 회원이 아니므로. 백의용사(白衣勇士)인 나의 명예를 더럽히지 말라. 무엇이 국가를 위한 것이고, 무엇이 애국을 위한 것이고, 무엇이 국민을 위한 것인지 생각하면서 사신(邪臣)이 되고, 구신(具臣)이 되고, 유신(諛臣)이 되고, 간신(奸臣)이 되고, 참신(讒臣)이 되고, 적신(賊臣)이 되지 마라. 노속(奴属)의 노속이 되지 마라. "잘못 알고 있는 것은 항상 위험하다." 나는 너희들의 ‘싸가지 애국’을 거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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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원 락빌, M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