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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단상] 유효기간이 남았나요

2024-12-20 (금) 이희숙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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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가 지나간다. 마지막 달력을 보며 남은 날들을 헤아린다. 올해엔 며칠이 남아있나? 유효한 날이 얼마 동안일까? 유효기간(Expire Date)은 다양한 분야에서 중요한 개념으로 사용된다. 그러기에 꼼꼼한 관심이 필요하다. 일상에서 최종 날짜로 확인한다. 잘 보이지 않는 시력 탓에 눈살을 찌푸리기도 한다.

손이 가장 많이 닿는 곳이 냉장고다. 꺼낸 음식 포장지를 샅샅이 훑는다. 눈으로 스캔해 확실한 날짜를 재차 알아보아야 한다. 유효기간이 지난 음식은 쓰레기통에 넣을 수밖에 없다. 안전하게 섭취하기 위해서다.

병약한 우리 부부의 필수품인 의약품 날짜를 확인해 주문하는 일은 주요 업무다. 일정 기간이 지나면 성분이 변질하거나 효과가 감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안전성을 고려하여 제품을 구매하거나 물품을 받을 때 유효기간을 굵은 글씨로 표시해 둔다.


나만이 겪어야 했던 중요한 유효기간이 있었다. 희귀한 자가면역 체제 질병에 의해 한쪽 눈 시력이 마비되었고, 그 상황에서 운전하려면 어쩔 수 없이 Low vision test를 거쳐야 했다. 운전면허 시험은 나에게 넘어야 할 높은 산이었다. 운전을 처음 시작하는 사람이 통과해야 했던 실기 시험처럼 2년마다 치렀다. 긴 날 동안 어렵게 받은 운전 면허증은 유효기간은 고작 2년이었다. 매번 면허를 갱신하기 위해 재발급 절차를 밟는 건 나에게 커다란 부담감을 주었다. 안과를 거쳐 DMV에서 소요하는 시간이 만만치 않았을 터.

이제 운전 면허증의 유효기간에서 벗어났다. 그렇다면 내 몸과 마음에도 유효한 시간이 있지 않을까? 골몰히 생각했다. 언제까지 일할 수 있을까? 일이란 내가 살아 있다는 의미가 아닐는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았다. 먼저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그동안 마음속에 잠자고 있던 불씨를 찾듯, 떨어진 낙엽을 갈퀴로 샅샅이 긁듯, 아니 속내를 뒤집어 보았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거다.

찾았다! 여고 시절 적어 두었던 시를 읽으면서 시네마 영상처럼 머릿속에 돌아가는 게 있었다. 오 남매의 장녀로서 먼저 직업을 염두에 두고 선택했던 교육대학, 그 뒤 갈피에 문학소녀의 애틋함이 숨어 있었다. 그 후 문예창작과에 늦깎이 학생으로 입학해 재도전했다. 책상에 앉는 오롯이 나만의 글 쓰는 시간을 즐겨한다. 나에게 주어진 새 영역이 나의 유효기간을 연장해 주었다.

며칠 전 조카가 생일을 맞았다. 미역국을 끓이고 김치와 돼지갈비로 구수한 한식을 차렸다. 생일 케이크에 불을 켰다. 이제 몇 살이니? 스물한 살이라고 하며 숨을 크게 들이마신 후 촛불을 껐다. 그 아이가 엄마의 뱃속에 잉태해 성장할 즈음 나는 실명 위기에 있었다. 내가 너를 만나볼 수 있을까? 조카 얼굴을 볼 수 없겠다는 마음에 상심했었다. 그런데 그 아이가 태어나 스물한 살이 되었다니! 점자를 배우려 했던 내가 컴퓨터 앞에서 자판을 두드리고 협회 웹사이트까지 관리하다니 놀랍다.

옆자리를 돌아본다. 남을 도와주면서 ‘나도 살아 있구나!’라는 벅찬 감동이 훅 들어온다. 남을 돌볼 수 있다는 건 내가 살아간다는 증표가 아닌가. 아픈 사람,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위해 여력을 쓸 수 있다는 게 기쁘고 감사로 다가온다.

유효기간을 정하는 건 나 자신이 아닐까.

<이희숙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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