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비서방 국가로는 경제발전과 민주주의를 함께 이룬 몇 안되는 나라 중 하나다. 일제 강점기와 해방 정국, 한국전쟁, 독재 정권을 거치는 동안 좀처럼 경제적 빈곤과 정치적 후진성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한국은 1960~1970년대 ‘한강의 기적’을 통해 산업화의 기틀을 마련했다.
공고한 산업화를 기반으로 국민들의 정치 의식이 깨어나면서 1980년대 후반 ‘87 체제’라는 절차적 민주주의를 이뤄내는데 성공했다.
이후 크고 작은 정치적, 사회적 혼란에도 불구하고 조금씩 조금씩 절차적 민주주의의 실질적인 내용을 채워 나갔다.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 부설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닛(EIU))’이 해마다 발표하는 ‘민주주의 지수’(Democracy Index)에서 한국은 2020년 10점 만점에 8.01점으로 23위에 오르며 ‘결함 있는 민주주의’에서 ‘완전한 민주주의’ 대열에 합류했다. 2023년 현재 한국의 민주주의 지수는 8.09점으로 전 세계 167개국 중 22위다.
한국인들은 더 이상 군대를 동원한 쿠데타와 내란과 같은 퇴행적 정치적 상황을 걱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국시간으로 지난 3일 밤 10시23분 윤석열 대통령의 긴급 담화를 통해 선포된 45년만의 비상계엄은 평범한 일상생활을 살아가던 한국인들은 물론 해외에 사는 한인들을 충격에 빠트렸다.
다행히 4일 새벽 1시 한국 국회가 본회의를 열고 비상계엄 해제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키면서 사실상의 친위 쿠데타이자 내란이었던 비상계엄은 155분만에 막을 내렸다. 계엄군이 국회에 진입한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에서도 국민들은 맨 몸으로 저항했고, 국회의원들은 침착하게 해제 결의안을 이끌어 냈다. .
계엄령 해제 소식이 전해지자 마자 테슬러 창업자이자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의 최측근인 일론 머스크가 자신이 운영하는 소셜미디어 X(구 트위터)에 올린 짧은 한마디는 ‘와우’(Wow)였다. 지난 14일 국회에서 윤 대통령에 대한 탄핵 소추안이 가결되기까지 여의도 국회의사당 주변을 중심으로 전국 곳곳에서 대규모 집회가 이어졌지만 물리적 충돌이나 과격한 시위가 단 한차례도 발생하지 않았다.
“쾅쾅 울리는 K-팝, 형형색색의 응원봉, 여기저기 서 있는 푸드트럭은 마치 축제에 나온 것 같았다.” 영국 언론 가디언은 ‘K-팝의 춤과 노래가 한국의 민주주의를 지켰다’고 뒤바뀐 상황을 이같이 전했다. 미국을 비롯한 전세계 국가들은 한국의 놀라운 ‘민주주의 회복력’에 주목했고, 유수의 언론들은 내란 위기 속에서도 홀로 빛난 ‘K-민주주의’ 모습에 찬사를 보냈다.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은 “나는 한국이 그들의 민주주의 회복력을 보여줬다는 점이 가장 중요하다 생각한다”고 밝혔다. 로이터 통신은 “MZ 세대의 적극적인 참여로 비폭력과 연대의 새로운 시위 문화가 탄생했다”며 “K-집회 문화가 차세대 민주주의를 이끌 것”이라고 호평했다.
워싱턴포스트(WP)도 조안 조 웨슬리언대 동아시아 연구 교수의 말을 인용해 “젊은 세대의 민주주에 대한 참여와 헌신은 한국 민주주의 미래에 대한 희망적 신호”라고 전했다. 이같은 상황에서 비상계엄이 일어나기 1년 반 전 한국이 다른 나라의 민주주의 발전에 크게 기여할 수 있다고 예상한 미국의 민주주의 정책 전문가 진단이 눈길을 끈다.
전미민주주의기금(NED)의 데이먼 윌슨 회장은 지난 3월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 기고에서 “전 세계에서 민주주의가 갈수록 공격에 직면한 가운데 한국은 세계의 민주주의 회복을 견인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특별한 위치에 있는 국가로 부상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그는 “한국이 서방 국가가 아닌데도 경제발전과 민주주의를 이룩해 다른 나라들이 따라 하고 싶어 할 모델이 되며 K팝과 K드라마 인기에 힘입은 소프트파워와 기술 혁신성을 갖춰 이런 주도적 역할을 하는 데 적합하다”고 평가했다.
이처럼 1987년 이래 이제 37살이 된 ‘신생 민주공화국’ 한국은 시민불복종과 법치주의가 신속하고 강인한 민주주의 회복력의 근간임을 세상에 각인시켰다. 앞으로 헌법재판소에서 탄핵 인용에 이르기까지의 지난한 여정이 예상된다. 하지만 서방의 민주주의 마저 위기에 처한 지금이야말로 한국이 민주공화국의 교본임을 보여줄 때다.
민주주의(民主主義)는 주권이 국민에게 있음을 의미하는 정치제도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는 헌법 제1조 문구로 이 칼럼의 결론을 대신하고자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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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세희 사회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