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의 제목은 폴 브랜드라는 의사가 쓴 <고통이라는 선물>이라는 책의 제목이다. 이 책의 저자인 폴 브랜드는 의료 선교사로 인도에서 20년, 미국에서 30년을 사역하면서 문등병이라 알려진 한센병 환자들을 돌보는 사역을 한 사람이었다. 이 책에서 의사 폴은 한센병 환자들을 돌보면서 가장 안타까운 것이 있었다고 말한다. 그것은 그들은 고통이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결국 죽게 된다는 사실이다.
한센병에 걸린 사람들은 손가락이 잘리고, 발이 잘리고, 코가 잘리는 등 신체 일부가 결국 떨어져 나가게 되는데, 그 이유가 바로 한센병은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병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들은 손이나 발이 뜨거운 불에 닿아 있어도 고통을 모르기 때문에 살이 타들어 가지만, 살이 타들어 가는지 알지 못한다. 맨발로 걷다가 발에 압정이나 못이 박혀도 고통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발에 압정이나 못이 박힌 줄 모르게 되고, 결국 발에박힌못 때문에 발이 썩게 되어 절단하는 일이 발생한다. 한센병에 걸린 사람들에게 가장큰 선물은 아이러니컬 하게도 바로 고통인 것이다. 그들이 고통을 느낄 수만 있다면 그들은 그렇게 비참한 삶을 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고통을 느낄 수 있는 것이 그들에게는 선물이었던 것이다.
어쩌면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현대인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고통을 피하려고 한다. 인류의 끊임 없는 발전의 원동력은 바로 인간의 삶에 있는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인류는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100년 전과 비교하면 인류의 많은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였다. 인류의 삶이 100년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편리해 진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컬 하게도 삶의 편리함이 인류의 행복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100년전보다 인류는 고통이 많이 사라진 편리해진 삶을 살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100년 전보다 인류가 행복해진 것은 아니다. 이유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고통이 가져다 주는 의미를 간과하였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앙도 마찬가지이다. 교회를 다니게 되는 이유의 대부분은 삶속에서 겪는 고통의 문제가 하나님의 도움으로 해결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도움으로 고통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만을 기대하면서 교회 생활을 하게 되면 얼마 가지 않아 실망하게 된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앙의 깊이는 바로 고통의 의미를 깨닫게 될 때 도달할 수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고통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한다. 성경 속 인물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전에 언제나 고통이라는 터널을 지나가게 됨을 보여준다. 고통의 터널은 힘든 시간이지만 그곳에서 고통의 의미를 깨닫게 될 때 그 고통의 터널을 벗어나게 되고, 삶의 고통은 좌절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사의 이유가 된다.
성경은 “환란 중에도 기뻐하라!”고 말한다. 어떻게 환란 중에 기뻐할 수 있는가? 그것은 고통이라는 선물의 의미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종교마다 서로 다른 가르침이 있지만 그 가운데 공통적인 가르침이 있다. 그것은 인간의삶은 고통이라는 사실이다. 인간이 살면서 고통이 없는 삶을 살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참된 행복은 고통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고통의 의미를 깨닫게 된 상태라고 말 할 수 있다. 고통이라는 선물의 의미를 깨닫게 될 때 우리는 진정한 행복의 문을 열게 된다.
<
유경재 나성북부교회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