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올 한 해의 끝자락인 12월이다. 이맘때쯤 학창 시절의 저편에 그리운 추억이 떠오른다. 하얀 칼라에 빳빳하게 풀을 먹여 곱게 다려 입었던, 특히 “어디로 가던 교복을 입고 다녀라. 학교를 졸업하면 입고 싶어도 못 입는다" 하시며 교복의 귀중함을 실감하지 못하는 철부지들이 안타까워 하시던 선생님의 말씀이 잊을 수가 없다. 꿈과 희망으로 어떤 잘못도 용서 받을 수 있는 교복의 위용을 절감하지 못했던 그 시점을 생각하면 절로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버스로 등, 하교를 할 때, 버스가 정류장에 정차할 때마다 차장은 사람들을 짐짝 밀어넣듯이 밀어 넣고 “오라이” 하면서 버스 옆구리를 손바닥으로 탕탕 치면 운전수 아저씨는 버스 몸체를 흔들어 빽빽하게 서있는 승객들의 혼을 뺀다.
그야말로 콩나물 시루가 따로 없었다. 운전수 아저씨는 심술 궂게 버스를 치밀어 좌석에 앉아있던 점잖은 신사를 운전석 앞에 까지 달려가게 하기도 한다.
그런 만원 버스 안에서도 그날 따라 말쑥하게 차려 입은 공고 남학생이 나에게 자꾸 눈길을 준다.
나는 한 손에는 책가방, 다른 한 손으로는 넘어지지 않으려고 손잡이를 꼭 잡고 목적지에 도착해서 내리니 두 남학생도 같이 내린다.
그 남학생들은 몇 번이나 나를 따라다니며 화나게 만들고 난처하게 했다. 한번은 화가 나서 ‘왜 자꾸 나를 괴롭히냐' 하니 “한번만 이야기 할 것이 있다”고 하면서… 옆의 말없는 친구 명찰을 떼어주면서 어떤 사람인가 학교에 알아보라고 하길래 나는 관심이 없다고 하니 그러지 말고 우리 한번만 만나자고 애원하길래 그 자리를 모면 하려고 그렇게 하겠다고 승낙을 하였다. 첫눈 오는 날 대구 극장 앞에서 오후 2시라고 하면서 헤어졌다. 안 나오면 십 년이고 이십 년이고 나올 때까지 그곳에 기다릴 것이라고 했다.
졸업을 앞두고 망년회 때 친구들과 이야기 꽃을 피울 때 첫눈이 온다고 다들 좋아서 바깥에 나가 고무풍선처럼 들떠서 있는데, 그 남학생들과 만나자고 한 약속이 생각이 났으나 만날 용기가 나질 않았다.
오후 5시다. 남동생을 시켜 대구극장 앞에 가보라고 시켰더니 학생복을 입고 모자 위에 눈이 수북히 쌓인 채로 발이 시린지 왔다 갔다 하면서 있다고 했다. 나는 남동생에게 지나간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그 이듬해 남동생이 첫눈 오는 날 그 자리에 갔더니 작년과 같이 그 남학생들이 그 자리에 서성이고 있더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후 몇 년이 지났는지 모르지만 약속을 어긴 죄책감이 든다. 어찌되었건 ‘약속은 했으면 지켜야 한다'.
첫눈 오면 생각나는 그 남학생… 나이를 먹음에 따라, 세월이 흐름에 따라 순수함은 사라지고 많은 세월이 흐른 탓인지 변해있는 나 자신을 한번 더 확인해보니 부끄럽기 짝이 없다. 요즘 애들은 만나자고 해서 안 나오면 곧바로 포기하며 눈을 다른 곳으로 돌릴 것이다. 사람과 대화보다 기계와 대화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앞으로는 사람과 로봇이 대화하고 쳇 GPT 열풍은 사람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로봇 시대를 예고 하고 있다고 한다. 지금쯤은 그 학생이 멋진 할아버지가 되어 있을 것이라고 믿고 싶다.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눈부신 햇살이 무지개 빛을 뿌린다.
오늘따라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있는 그리움, 되돌아 갈 수 없는 까닭일까? 아픔을 내면에 성숙으로 키워낸 학창시절의 추억이 빈 시간 속에 서성이고 있다.
<
김수현 포토맥문학회 페어팩스, V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