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워낙 기쁜 소식인데다 이에 관한 뉴스와 화제가 계속되고 있으니 한 번 더 써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지난주 칼럼(‘채식주의자 소년이 온다 작별하지 않는다’)은 갑작스런 수상 발표에 흥분하여 서둘러 쓴 감이 있었다. 불과 엿새 동안 다섯 권을 읽고 썼는데 한강의 소설은 그렇게 빨리 읽어서는 안 되는 책들이다. 하여 마음을 여미고 그중 가장 여운이 길었던 ‘흰’과 ‘희랍어 시간’을 천천히 다시 읽었다.
한강의 대표작은 부커상을 수상한 ‘채식주의자’와 노벨상을 수상한 ‘소년이 온다’, 그리고 최근작인 ‘작별하지 않는다’라 할 수 있다. 스웨덴 한림원은 수상작품을 특정하지 않았으나 “역사적 트라우마를 직시하고 인간 삶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강렬하고 시적인 산문을 선보였다”는 선정 이유에서 광주항쟁을 다룬 ‘소년이 온다’가 주요 후보작이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이 세 소설은 인간의 폭력성에 관한 작품인데 비해 ‘흰’과 ‘희랍어 시간’은 폭력과는 무관하고 역사와 사상성 논란의 여지도 없는 내밀한 고백이어서 개인적으로 울림이 더 깊었다. 무엇보다 한강의 문체가 얼마나 사려깊고 아름다운지 단어와 문장, 그 사이사이 여백들이 너무나 예민해서 몇 번이고 다시 읽어야했다. 한글로 이렇게나 사람의 마음을 섬세하고 위태롭게 그려낼 수 있다니, 그 밀도와 깊이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흰’(2016)은 한강 작가의 어머니가 낳은 첫 아기, 태어난 지 두 시간 만에 숨을 거두었다는 언니를 애도하며 쓴 자전적 소설이다. 소설이라기보다 시처럼 읽히는 조각글의 묶음으로, ‘채식주의자’에 이어 2018년 다시 한 번 부커상 후보에 올랐던 작품이다. 모든 흰 것들, 배내옷 강보 젖 입김 서리 눈 달 소금 넋 나비 쌀과 밥 안개 파도 모래 수의 소복 재 등에 관한 65개의 잔잔한 사유를 기록하고 있다. 한강은 이 책의 출간을 앞두고 죽은 언니의 배내옷을 만들고 소금과 얼음을 손 위에서 녹이는 고요한 퍼포먼스를 갖기도 했다.
‘희랍어 시간’(2011)은 개인적으로 가장 아끼는 책이다. 갑자기 말을 잃고 침묵에 갇힌 여자와 서서히 시각을 잃어가는 남자가 만나는 찰나의 이야기, 그 동결된 아픔과 희열의 감정선을 곱고 절제된 언어로 그려낸다. 영원과도 같은 어떤 찰나들이 만나는 장면 역시 그 함축성에 있어서 시와 같다.
두 소설은 마음이 깨끗하게 비어있어야 읽을 수 있는 책들이다. 생각이 많아서는 갈피를 읽지 못하고 지나치게 된다. 부드럽지만 강렬하며 초현실적이기도 한 서술이 조용히 빛난다.
소설가 김중혁은 한강의 글이 눈과 같다고 말한다. “눈이 내리는 것은 무거워서인데 아름답다. 한강의 문장도 무거운데 아름답다. 눈은 내리면서 쌓인다. 어떤 건 녹고 어떤 건 계속 쌓이면서 그 쌓이는 것이 누굴 적시게 된다.”
이동진 비평가는 한강의 책은 “촉각에 호소하는 문장”이라며 “점자로 읽는 느낌이 든다”고 했다. 손으로 더듬으며 천천히 읽어간 사람만이 ‘희랍어 시간’의 아름답고 극적인 엔딩에 이를 수 있다는 설명이다.
전 남편인 문학평론가 홍용희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한강은 한 줄 한 줄 혼신을 다해서 몸이 아플 만큼 쓰는 체질이다. 그렇게 열심히 쓰고 고치고, 다시 쓰고 고치는 과정은 옆에서 보기에 굉장히 존경스럽고 경이롭다” 한강의 글 마디마디에서 숨과 땀과 혈이 느껴지는 이유다.
여러 작가와 평론가들의 코멘트를 들어보면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문학 서클에서는 거의 기정사실로 예측됐던 듯하다. 다만 그의 나이(53)가 다른 노벨상 수상 작가들에 비해 상당히 젊다는 점에서 이처럼 빠른 수상을 기대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만큼 한강의 문학적 역량은 국내외에서 탄탄한 명성과 인지도를 갖고 있었다는 뜻이다.
한국은 독서량이 선진국 중에서 최저 수준인 나라다. OECD 조사로는 스웨덴, 핀란드 등 북구의 나라들이 가장 책을 많이 읽고, 2017년 성인 월간독서량은 미국(6.6권), 일본(6.1권), 프랑스(5.9권) 등의 순인데 한국은 한참 아래 0.8권으로 조사됐다. 문화체육관광부의 ‘2023 국민 독서실태’에서는 지난해 성인 10명 중 6명은 책을 단 한 권도 읽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그런 한국에서 지금 놀라운 독서 열풍이 불고 있다. 노벨상 소식이후 불과 일주일 동안 한강의 책은 100만부 이상 팔렸고, 한강이 언급하거나 추천했던 책들, 또 아버지 한승원의 책들까지도 엄청나게 많이 팔려나가고 있다는 소식이다. 더불어 2024 톨스토이 문학상을 받은 김주혜 소설 ‘작은 땅의 야수들’과 2022 부커상 후보였던 박상영의 ‘대도시의 사랑법’, 한강이 노벨위원회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언급한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동화 ‘사자왕 형제의 모험’도 판매가 폭발적 증가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처럼 단 시간에 사람들이 책방에 몰려들고 줄을 서는 광경은 한국인들만이 보여줄 수 있는 즉각적이며 역동적인 추진력이다. 이제 거의 전 국민이 한강의 책을 손에 들고 읽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얼마나 놀랍고 감동적인가.
하지만 한강의 작품은 쉽게 읽히는 책들이 아니다. 느리고 무겁고 아프다. 누군가에게는 도전이 될 수 있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책장이 잘 안 넘어갈 수도 있다. 지금 이 시기에 한강의 책은 우리에게 필요한 처방일지도 모른다. 빨리빨리 문화에 길들여진 사람들, AI의 알고리듬에 휘둘리는 사람들이 좀 더 생각하고 성찰하며 깊어지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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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