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오늘 하루 이 창 열지 않음닫기

[전문가 칼럼] 도망치고 싶은 본성

2024-10-08 (화) 천양곡 정신과 전문의
크게 작게
모두 바쁘게 살며 가끔은 내가 누구고 왜 사는 가에 대한 삶의 목적과 의미의 혼란에 빠진다. 이를 잘 감당하지 못하면 현실에서 도망치려고 한다. 보통 50대 중년에 이런 경험을 많이 한다. 인생 사이클의 한 코너인 중년이 변화와 갈등으로 고통 받는 삶의 시기이기 때문이다. 스트레스가 심한 중년의 시기를 결정하는 나이는 쉽지 않다. 생물학적 중년은 몸이 성장을 멈추고 퇴화를 시작하는 30대 이후, 사회적 중년은 자기 자신에 대해 보편적 공감대가 형성되는 60대로 본다. 반면 심리적 중년은 자신이 이제 중년이구나 하고 인정하는 때를 뜻한다. 생물학적, 사회적 중년의 시기는 개인에 따라 별로 차이가 없으나 심리적 중년은 개인차가 아주 높다.

3면이 서로 맞닿는 삼차원의 세계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서로 연결되는 면이 흔들리면 삶에 고통이 따른다. 자연현상의 하나인 지진이 한 예다. 또한 심리적 발달단계인 아동기, 학년기, 사춘기, 청년기, 중년기, 노년기 등 인생여정의 언저리를 돌 때마다 심적 흔들림을 만난다. 그 중 사춘기와 중년기에 자신의 정체성과 삶의 목표에 대한 문제로 크게 흔들린다. 중년을 사추기 혹은 제 이의 사춘기로 불리는 이유다. 청소년 사춘기는 변화를 이룰 수 있는 시간이 있어 미래를 바라보는 희망이 남아 있다. 중년의 사춘기는 그런 시간적 여유가 없어 위기의식을 느끼며 산다. 그래서 지나간 삶을 되돌아 보고, 남은 삶에 대해 깊히 생각하고 고민하는 때다. 제대로 이루지 못한 성취에 대한 아쉬움과 자책, 점 점 다가오는 늙음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정서적 갈등과 혼란에 휘말리기 쉽다.

중년이 되면 다양한 정신과적 문제를 보인다. 기존의 정신질환이 악화되거나 새로운 정신병이 발생하기도 한다. 중년이 왔다는 생각에 반기를 들고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기 위해 평소의 자기답지 않게 돌발적 행동을 취할 때도 있다. 잘 하고 있는 직장일을 충동적으로 그만두거나, 순탄한 결혼생활을 벗어나 다른 이성과 새로운 인간관계를 맺는 외도 등 현실상황에 타당치 않는 삶의 변화를 택한다. 그럼 무슨 정신질환이 중년위기를 흔하게 발생하는가? 나의 임상현장에서는 양극성 2형 장애(2형 조울증)가 제일 많았다.


1970년 초반 정신과수련의를 할 때 교과서에 조울증 진단의 정의가 적혀 있었다. 기분이 하늘로 솟았다가 점 점 평지로 내려와 어느 기간 쉬다가 때가 되면 바다 속 깊히 들어가는 조증과 우울 패턴이 반복되는 정신병이다. 조울증은 증상의 강도와 기간이 다를뿐 조증과 우울, 그리고 증상이 없는 기간이 확실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후 1980년 초에 조울증의 진단명이 공식적으로 양극성 장애로 바뀌었다. 기분 상태가 극과 극을 달린다는 의미였다. 당시 양극성장애 진단은 기분증상은 물론 에너지와 활력, 의지의 중요성도 강조됬다. 1990대 중반에 이르러 전통적 양극성 장애는1형이고, 경조증 증세와 우울 증세가 반복되는 조울증을 2형 양극성 장애라 불렀다.

2형 양극성 장애의 특성은 조증이 심하지 않아 1형 양극성 장애처럼 병원 치료가 거의 필요 없다. 경조증 상태는 머리 회전이 빨라 여러 생각들이 잘 돌아가고, 특별한 일이 없어도 항상 기분이 좋아서 말도 많이 하고, 여러 사람과도 만나고, 몇가지 일을 동시에 해도 피곤하지 않아 세상 살 맛이 난다. 그러다 우울 상태가 찾아오면 우울감과 에너지, 활력의 저하는 전통 우울증보다 심하고, 우울기간도 길어 환자를 더 고통스럽게 만든다. 경조증과 우울증 발생 사이의 증상이 없는 기간도 짧아서 환자는 항상 우울하다고 호소한다. 확실한 진단과 치료도 1형 양극성 장애보다 훨씬 어렵고, 자살위험이 높고, 다른 정신질환과 함께 발생하는 경우가 흔하다.

오래된 환자 얘기다. 50이 막 넘은 가정 주부가 눈이 퉁퉁 부어 진료실로 왔다. 남편이 염려스러워 잠을 통 못자고 걱정에 쌓여 있다는 호소였다. 자식들 다 키워 밖으로 내보내고 환자 자신도 갱년기 때문에 힘들어 이제 좀 쉬려 했는 데 남편이 문제를 일으켜 어떻게 할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근래에 남편이 예전 같지 않게 짜증을 자주 내고, 주말에 좋아 하는 골프도 안나가고, 퇴근하면 가족과 꼭 할만만 하고, 성행위도 끊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환자와 상의도 없이 오래 다니든 직장을 그만 두었다. 몇 주전에는 새 직장 인터뷰하러 나갔다가 시골에서 바람 줌 쏘이고 온다 했는 데 아직도 돌아오지 않아 속이 탄다고 했다.

시집살이에 비유하여 남편때문에 생기는 여성의 중년위기를 남편살이라 부른다. 한국 통계에 의하면 은퇴 남편을 둔 전업 주부의 60%가 화병을 앓고 있다고 한다. 남편살이 중년위기는 고통스럽고 화가 치민다. 하지만 너무 부정적으로 생각해 자신의 삶을 서둘러 결정하면 나중에 후회가 될 수 있다. 위험스런 시기를 잘만 넘기면 자기 성장을 위한 성찰의 기회도 된다. 자신이 처한 현재의 삶을 직시하고 삶의 가치에 대해 순서를 매기는 일이 중요하다. 그래야 다가오는 인생을 보다 즐겁고 행복하게 보낼 삶의 방향을 찾을 수 있다.

물고기는 물이 있어야 살고, 산소는 모든 생명체에 필요하고, 애정은 영혼을 밥멱여 준다. 중년기의 심신의 건강과 행복감도 이와 같이 서로 떼어놀 수 없는 절대적 관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천양곡 정신과 전문의>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