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틈에 가을이 다가와 느긋하게 자리를 잡는다. 그 지겨웠던 한여름 더위를 조용히 제압해 버리고 서늘한 시그널로 새 장르를 시작한다.
내게 있어 해마다 가을은 나의 근엄한 스승이다. 무더위와 함께 사정없던 조바심을 식혀버리고 풍요의 열매들과 코스모스의 정숙한 미소를 이끌어 내는 가을…. 그 정취에 묻혀 한해의 내력을 적어낼 수 있는 가을이 좋을 수밖에 없다.
버릇처럼 가을이 나의 심연을 자극할 때마다 언제나 그리던 남미 안데스 산맥 하늘 위로 날아 오른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날개가 길다는 ‘콘도르(Condor: 남미산 큰독수리)’를 만난다. 그리고 콘도르의 혼백에 마냥 취해 버린다. 이 시간이야 말로 가장 숨어 있던 소망이 펼쳐지는 순간이다.
콘도르와 함께 짙푸른 창공에 두 날개를 펴고 유유히 세상을 관조하는 거기에는 고요와 평화가 깔려 있을 뿐이다. 풍랑, 파도 없이 드넓은 ‘티티카카 호수(Titicaca Lake: 퓨마의 호수)’가 일체 무(無)를 시범 보이고 해맑은 바람소리들은 속세에서 묻어나오는 폐 먼지를 적극 거부한다.
속세의 비열한 질투, 시기, 더러운 욕설, 모략, 사악한 사기행각… 그런 예토(穢土: 더러운 세계)를 벗어나 오로지 평화만이 존재하는 안데스산 정토, 코발트색 창공을 주인공 콘도르와 함께 유유히 날아보는 것도 그럴듯한 아이디어가 아닐까.
가을은 내게 그런 차원은 상상을 하도록 띄워 올려서 어느 계절보다 더 좋아하는 모양이다. 숨 막히도록 무더운 계절에 안타까운 열망으로 영혼을 예리하게 긁어내리는 바흐(Sebastian Bach)의 ‘G 선상의 아리아’를 더 깊이 파고들 것까지는 없지 않나. 티티카카 호수처럼 침잠해 곡조를 이끌어 가는 멘델스존(Felix Mendelssohn)의 ‘바이올린 협주곡 E 단조(Violin Concerto in E Minor)’를 계절의 양념으로 맛보는 것이 더 현명하지 않을까.
시인 백석의 말처럼 내가 나의 영혼을 데리고 안데스 창공의 콘도르에게로 가는 것은 살기등등한 세상사와 자비심 없는 무더위에 지는 것이 아니다. 자연 순환 진리를 뒤엎고 징벌적 의미를 담은 무더위와의 상종을 피해 숨고르기를 하려는 것이다.
다시 가을을 맞으며 아날로그(analog) 구태와 디지털(digital) 신문명 사이에서 더 깊숙이 빠져 갈등 겪는 이 가을에는 잉카 후예들의 지혜와 슬기를 모아 한껏 누렸다던 문명의 진면목이 환상 속에 되살아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묘한 곡절을 비웃을 것이다.
올 가을도 나는 안데스 창공의 콘도르가 되어 한가로이 옛날 일들을 생각하며 미소를 배울 것이다. 그리고 청소년 시절 간직했던 진주알처럼 고운 추억들을 잊지 않고 열람해 볼 것이다.
어느 가요 가사처럼 “하얀 종이 위에 곱게 써내려간 너의 진실 알아내고 난 그만 울어 버렸네…” 그 해맑은 추억들을 잔잔한 아쉬움으로 되살려 보기도 할 것이다.
나이 탓인가, 눈앞에 와 있는 올 가을은 유난히도 숱한 ‘연대기(年代記)’를 싣고 오는 것 같다. 벌써부터 나 스스로를 쉴 새 없이 회억에 젖어들게 만드는 것 같다. 순간적 타락일까, 아니 인생이 다 그런 것일까.
나의 애송시 박목월의 “강나루 건너서 밀밭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리/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로 잔을 잡는다. 가을을 감상하는 잔이자 진지하게 가을을 풍미하는 의식인지도 모르겠다.
누가 가을을 외롭다 하고 슬프다고 했던가. 누가 가을을 넉넉하고 보람의 계절이라고 했던가. 내게 있어서 가을은 한껏 시련의 질곡을 헤어나고 냉엄한 겨울을 침착하게 뛰어 넘을 수 있는 저력을 비축하는 야심찬 계절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렇다. 가을은 안데스 산 창공에 코발트 색 낭만과 산 아래 넓게 넓게 펼쳐진 티티카카 호수의 침잠한 신념과 온갖 고뇌와 분노를 삼키고 굳건히 자존심을 가슴에 안아 모든 이들의 삶을 관찰하고 있는 콘도르가 되어 들판에 만발한 코스모스와 들국화를 입맞추는 가을을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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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용 전 한민신보 발행인, V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