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나비부인’의 명과 암

2024-09-25 (수) 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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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15일 광복절에 공영방송 KBS가 ‘나비부인’을 방영한 일로 한국에서 잠시 난리가 났었다. 이날 새벽 열두시 땡 치자마자 내보낸 첫 프로그램이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부인’이었다는 것이다. “광복절에 일본 기모노를 봐야하냐”라는 시청자들의 분노와 항의가 잇달았고, 정치권에서는 친일정권의 의도적 도발이란 비판까지 나왔다. 이 오페라에는 기모노뿐 아니라 일본국가와 미국국가의 멜로디가 나오고, 일본의 전통 5음계를 사용한 선율도 많이 나온다. 고의였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방송국의 무개념, 무감각은 지탄받아 마땅하다고 본다.

푸치니의 ‘나비부인’(Madame Butterfly)은 20세기 초 일본이 배경인 작품이다. 이 시기에 우리나라는 일제의 야욕으로 식민지 수탈을 겪었지만, 유럽에서는 일본류 열풍 즉 자포니즘이 한창이었다. 당시 판화를 통해 일본문화를 처음 접한 유럽인들은 동양미술의 평면성과 단순한 형태, 과장된 구도와 표현에서 신선한 영감을 얻었고 고흐, 모네, 마네, 로트렉, 드가 등 거의 모든 인상파 화가들이 자포니즘 영향을 받은 작품을 그렸다.

드뷔시가 호쿠사이의 파도그림을 보고 ‘바다’(La Mer)를 작곡한 사실은 유명하고, 자코모 푸치니 역시 1900년 런던에서 연극 ‘마담 버터플라이: 일본의 비극’을 관람한 후 크게 감동받았다. 이 연극은 나가사키에서 실제 있었던 한 게이샤 이야기 즉 서양인 장교와의 사랑에 실패하고 자살한 여인에 관한 것으로, 프랑스 작가가 쓴 소설을 미국 작가가 희곡으로 각색한 것이었다. 푸치니는 저작권 협상을 하자마자 대본을 만들고 오페라 작곡에 착수했으며, 초초상이라는 주인공 캐릭터를 공들여 창조해냈다.


‘나비’라는 이름의 초초상은 명문가 딸이었으나 집안이 몰락하여 게이샤가 된 15세의 아름답고 청순한 소녀. 중매쟁이 소개로 나가사키에 주둔한 미 해군대위 핑커튼과 결혼식을 올린다. 핑커튼은 잠시 현지처를 두는 마음이지만 초초상은 종교까지 개종하고 친척들과 의절한 채 일편단심 그를 사랑한다. 하지만 얼마 후 미국으로 떠난 핑커튼은 3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고, 하녀 스즈키를 비롯한 주위 사람들은 이제 그만 포기하고 재혼하라고 권하지만 초초상은 단호히 거절한 채 어린 아들을 키우며 기다린다. 그러던 어느 날 핑커튼이 미국인 아내와 함께 나타나자 충격 받은 초초상은 아들과 작별인사를 나눈 후 자결한다.

‘나비부인’은 스토리가 단순하고 등장인물도 적은 오페라다. 초초상 한 사람이 처음부터 끝까지 전체 공연을 끌고 가다시피하기 때문에 주역가수의 역량에 따라 성패가 갈리는 작품이다. 그리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초초상 역은 아시안이 아닌 백인 소프라노들이 맡는 게 당연했었다. ‘나비부인’뿐 아니라 ‘투란도트’와 ‘아이다’ 등 아시안 여성이 주인공인 오페라들에서 주역은 모두 백인여성 차지였다.

그런데 최근 들어 사정이 달라졌다. K-클래식이 부상하면서 한국 출신 소프라노들이 나비부인 역을 도맡기 시작한 것이다. 지난 21일 LA오페라가 2024-25 시즌 개막작으로 올린 ‘나비부인’이 좋은 예로 초초상 역에 카라 손, 하녀 스즈키 역에 메조소프라노 김효나, 야마도리 공에 바리톤 손형진이 출연해 무대를 빛냈다. 한국인 3명이 주역을 맡은 ‘나비부인’은 세계적으로도 흔치 않을 터, 세 사람 모두 노래와 연기가 어찌나 특출하던지 가슴 뿌듯하게 극적이고 애절한 무대를 볼 수 있었다.

특히 주역 카라 손(Karah Son 손현경)은 초초상에 특화된 가수로 20여개 프로덕션의 ‘나비부인’에서 300번 이상 노래한 경력을 갖고 있다. 이것은 정말 대단한 일로 초초상은 소프라노에게 가장 도전이 되는 역으로 유명하기 때문이다. 특히 1막에서 15세 청순가련한 소녀가 2막에서는 아들을 키우며 남편을 기다리는 성숙한 여인으로 변화하는데, 카라 손은 귀여운 소녀에서 남편에 대한 변치 않는 사랑을 보여주는 품위 있는 여인의 복합적인 감정을 강렬하게 그려내어 박수갈채를 받았다.

메조소프라노 김효나 역시 풍부한 성량과 실감나는 연기로 하녀 스즈키의 존재감을 확실하고 설득력 있게 그려냈으며, 풍채도 당당한 바리톤 손형진은 몇 소절이라도 더 듣고 싶을 만큼 우렁찬 저음으로 무대를 휘어잡았다. 손형진은 이번 시즌 LA오페라의 영 아티스트에 선발된 인재로, 바로 다음 공연 ‘로미오와 줄리엣’에도 그레고리오 역으로 나온다. 또 이 오페라의 주역 로미오를 노래하는 테너 역시 한국인 듀크 김이니 38년 역사의 LA오페라에서 한국인 가수들이 이처럼 많이 캐스팅 된 시즌은 올해가 처음이다. LA오페라에 대한 한인들의 사랑과 지원이 더 필요하고 중요한 시점이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자면 ‘나비부인’은 개인적으로 가장 싫어하는 오페라의 하나다. 내용이 재미없기도 하지만 오리엔탈리즘이 주는 동양여성에 대한 환상, 무조건적인 희생과 순종을 이상적으로 여기는 서양남성들의 고정관념이 유치찬란하기 때문이다. 청승과 신파가 작열하고, 성차별적이며 인종차별적인 오페라를 보는 것은 짜증나는 일이다. 이번에도 한국인 성악가들이 다수 출연하지 않았다면 보러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비부인’의 인기는 100년 넘게 건재하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거의 매 시즌 공연되고 있고 전 세계 공연회수에서 6~7위를 다툴 정도의 흡인력을 가졌다. LA 오페라의 이날 오프닝 공연도 팬데믹 이후 오랜만에 빈자리 없이 성황일 정도로 성공적이었다.

10월13일까지 5회 공연이 남아있다.

<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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