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사랑한다’

2024-09-10 (화) 정호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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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그릇을 들고 길을 걷는다
목이 말라 손가락으로 강물 위에
사랑한다라고 쓰고 물을 마신다
갑자기 먹구름이 몰리고
몇 날 며칠 장대비가 때린다
도도히 황톳물이 흐른다
제비꽃이 아파 고개를 숙인다
비가 그친 뒤
강둑 위에서 제비꽃이 고개를 들고
강물을 내려다본다
젊은 송장 하나가 떠내려오다가
사랑한다
내 글씨에 걸려 떠내려가지 못한다

‘사랑한다’ 정호승

‘사랑한다’는 말에 걸려 떠내려가지 못하는 게 한둘이랴. 긴긴 겨울밤마다 고라니가 우는 소리를 들어보았는가? 봄밤에 우는 소쩍새 소리를 들어보았는가? 여름내 자지러지게 우는 매미 소리를 들어보았는가? 가으내 우는 귀뚜라미 소리를 안 들어보았는가? 구글 번역기로 저들의 말을 번역해 보았는가? ‘사랑한다’는 말 빼고 대체 무슨 단어가 남던가? 수, 금, 지, 화, 목, 토, 천, 해왕성이 덜커덩거리며 여태껏 태양 주위를 맴도는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아침마다 집 나온 당신, 저녁마다 되돌아가는 까닭이 무엇 때문이겠는가? [시인 반칠환]

<정호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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