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한 번도 고향을 잊은 적 없어요”

2024-09-02 (월) 이창열 기자
크게 작게

▶ 흥남철수 생존 한인 2명, 이산가족 등록법안 상정한 케인 의원 면담

▶ VA 센터빌 장송 씨 게인스빌 전선복 씨

“한 번도 고향을 잊은 적 없어요”

흥남철수 당시 빅토리아호를 타고 피난한 장송 씨가 약 90년전 본인의 어머니와 함께 찍은 사진을 팀 케인 연방 상원의원에게 보여 주며 재미한인이산가족들의 아픔을 알리고 있다. 왼쪽부터 이산가족 전선복 씨, 통역 이현정 씨, 장송 씨, 케인 의원.

한국전쟁 당시 흥남철수 생존 한인 2명이 국무부가 미국 내 한인 이산가족명단을 파악해 등록하도록 하는 법안을 상정한 팀 케인 연방상원의원(민, VA)을 만나, 애환을 토로했다.

버지니아 센터빌 거주 장송 씨와 게인스빌 거주 전선복 씨는 29일 센터빌 도서관에서 케인 의원을 만나, 자신들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리며 법안이 빨리 통과될 수 있도록 힘을 써달라고 당부했다.

1933년 생으로 올해 91세인 장송 씨는 학교에 등교했다가 친구들과 함께 한국군의 도움으로 1950년 12월24일 빅토리아호를 타고 피난길에 올라 다음날인 25일 거제도에 도착한 이후 70년 이상 부모와 동생 4명 등 가족들과 생이별을 했다.


한국전 참전용사이기도 한 장 씨는 “12월24일 빅토리아호는 사람을 조금이라도 더 싣기 위해 탱크와 트럭을 바다로 던졌고 나는 12월25일 거제도에 도착했었는데 당시 북한에서 왔다고 해서 헌병과 경찰들이 ‘빨갱이 새끼야’라고 부르는 등 인권유린이 심해서 고향을 바라보며 몇차례 통곡하고 피난 온 것을 후회하기도 했지만 이후 한국전쟁에 참전, 육군에서 3년, 해군에서 12년 월남에서 2년, 캄보디아에서 1년 등 총 18년간을 군 생활을 하고 전역했다”면서 “한시도 고향을 잊은 적이 없고 마지막 소원은 어머니를 포함한 가족들의 유해라도 찾는 것”이라고 말했다.

장 씨는 90년전 사진이라면서 어머니와 함께 찍은 사진을 보여주며 가족을 보고 싶은 마음을 전했다.
장 씨는 “지금도 한으로 남는 것은 내가 미국에 산지가 50년이 됐는데 한국에 있는 이산가족들은 여섯 차례 가량 북한에 있는 가족들을 상봉할 기회가 있었지만 나는 미국 시민권자라서 그런 기회도 주어지지 못했다는 것이 서러웠다”고 말했다.

1936년 생으로 올해 88세인 전선복 씨는 1950년 12월4일 부모님과 큰 언니내 가족 7명, 작은 언니내 가족 3명과 함께 수송선을 타고 피난길에 올라 3일 뒤인 7일 거제도 장승포에 도착한 이후 인민군으로 끌려간 오빠와 당시 평양에 있었던 맏언니와 생이별을 했다.

전선복 씨는 “당시 북한은 기독교인은 모두 죽인다고 해서 눈 오는 겨울 흥남부두에서 수송선을 타고 장승포에 도착했다”면서 “평양에는 맏언니와 조카 3명이 있었는데 부모님은 죽을 때까지 두고 온 아들과 언니를 그리워했다”고 말했다.

마르코 루비오 연방 상원의원(공, 플로리다)과 함께 지난 3월 6일 한인 이산가족 등록법안(Divided Families National Registry Act)을 공동 상정한 팀 케인 연방상원의원은 “한인 이산가족 등록법안은 비록 생이별을 한 당사자는 못 만나더라도 등록을 해놓고 북미관계가 개선되면 후손들이라도 만날 수 있다는 마음에서 상정했다”고 말했다.

<이창열 기자>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