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한국기업 일방적 투자철회, 미국 주정부 ‘믿는 도끼에 발등 찍혀’

2024-08-28 (수) 황양준 기자
크게 작게

▶ “지난해 6월 짧은 이메일 하나로 제련소 건설 백지화시켜 황당”

▶ 문제의 이그니오 인수한 고려아연 대금 ‘4억4,200만달러’도 논란

한국기업 일방적 투자철회, 미국 주정부 ‘믿는 도끼에 발등 찍혀’

이그니오가 제련소를 짓기로 했던 부지에 대창시트 공장이 들어서 있다.

한국의 중견기업이 미국에 대규모 투자를 하겠다고 약속한 뒤 별다른 설명도 없이 일방적으로 투자철회를 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로 인해 투자 유치를 약속받았던 조지아주 정부는 ‘믿는 도끼에 발등 찍혔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어 한국 기업에 대한 신뢰도에 먹칠을 하고 있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조지아주는 현대차가 55억 달러를 투자해 대규모 전기자동차 공장을 건설하는 등 한국기업의 ‘미국 투자 성지’로 불리는 곳이기도 하다.

본보 취재와 현지 언론 보도에 따르면 문제는 세계 최대 아연제련기업인 한국의 고려아연이 2022년 두 차례에 걸쳐 모두 4억4,200만달러(5,800여억원)를 들여 미국의 전자 폐기물 재활용회사인 이그니오(Igneo)라는 회사를 100% 인수하면서 불거졌다고 할 수 있다.


이그니오는 고려아연에 인수되기 한 해 전인 지난 2021년 10월 이그니오 테크놀로지(Igneo Technology)를 통해 조지아주 사바나에 8,500만 달러를 들여 미국 내 첫번째 전자 폐기물 재활용 시설을 짓겠다고 발표했다. 제련소 규모는 연간 생산량 9만톤, 완공 목표는 2023년이었다.

당시 브라이언 켐프 조지아 주지사는 이같은 투자계획을 직접 발표하면서 150개의 일자리를 창출할 것이라는 밝은 전망을 제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고려아연이 이듬해인 2022년 이그니오를 인수하면서 투자계획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고려아연은 2022년 7월 1차 투자로 미국 내 자회사인 페달포인트(Pedalpoint Holdings LLC)를 통해 3억3,222만 달러를 들여 이그니오 홀딩스의 지분 73%를 확보했고, 이어 같은 해 11월 2차 투자로 1억1,020만 달러를 들여 나머지 지분을 확보하면서 100% 지분을 소유하게 됐다.

이그니오 테크놀로지는 당초 사바나 항구 및 화물 철도역과 인접한 Sea Point Industrial Terminal Complex에 제련소를 지을 계획이었으나, 고려아연이 인수를 한 뒤인 2022년 10월께 갑작스레 건설 부지를 Savannah Chattam Manufacturing Center로 변경했다. 새로운 부지는 현재 공사중인 현대자동차 전기차 공장과 가깝기는 하지만 사바나 항에서는 자동차로 30분 가량 걸리는 거리에 있는 곳이어서 입지는 더 안좋아졌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바나 경제개발국(SEDA)은 이그니오의 부지 변경 요청을 받아들여 해당 부지에 대한 인프라 공사를 약속했다. 하지만 이 무렵부터 이그니오는 제련소 완공시점을 계획보다 2년 늦은 2025년으로 변경하는 등 이상한 움직임을 보였다.

SEDA측이 부지조성 작업 등을 벌이고 있었지만 제련소 건설은 별다른 진척을 보이지 않다 지난해 6월 이그니오는 SEDA측에 “조지아주에 시설을 설립하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짧은 이메일을 보내는 것으로 투자 철회를 일방 통보했다.
한국기업 일방적 투자철회, 미국 주정부 ‘믿는 도끼에 발등 찍혀’
한국기업 일방적 투자철회, 미국 주정부 ‘믿는 도끼에 발등 찍혀’


조지아주 경제개발 전문가들은 “통상적으로 투자를 결정하거나 변경할때 주정부 당국과 수차례 모임과 회의를 통해 결정하는데 짧은 이메일 하나로 대규모 투자계획을 백지화한 것은 상식에 어긋나는 황당한 처사”라고 지적하고 있다.


한국 기업이 미국 정부를 대상으로 약속했던 투자 계획을 일방적으로 철회한 첫 사례로 기록되면서 조지아주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제련소에 들어설 예정이었던 부지에는 결국 현대차 협력업체 대창시트(DSC)가 들어서기로 결정돼 조지아주 정부로서는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고려아연은 물론 한국기업에 대한 신뢰도에 큰 상처를 입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미국 주정부 단위를 상대로 일방적인 투자계획 철회를 하면서 고려아연이 이그니오를 인수했던 4억4,200만달러라는 거액의 인수대금에 대해서도 의혹의 눈길이 쏟아지고 있다.

2006년 프랑스에서 출발한 이그니오는 2021년 미국으로 거점을 옮기며 이그니오 홀딩스를 비롯한 여러 계열사를 잇달아 설립했다. 고려아연은 미국에 설립된 지 1년 밖에 안 된 사실상 신생 회사를 5,800억 원에 인수한 것이다.

게다가 인수 당시 이그니오는 자본 잠식 회사라는 논란이 있었다. 고려아연의 23년도 사업보고서 기준으로 이그니오를 포함한 페달포인트 홀딩스의 포괄손익은 -415억 원으로 큰 손실을 입고 있다.

고려아연이 영풍과 경영권 분쟁으로 인해 내부적인 갈등이 격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투자 철회 결정도 이같은 경영권 분쟁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고려아연의 이그니오 인수 시점은 영풍과 지분 갈등이 벌어진 시점과 겹친다. 고려아연은 2022년 8월 한화 그룹의 해외 계열사인 한화H2에너지USA에 5%를 유상증자한 것을 시작으로 최근까지 제3자 배정 유상증자 및 자사주 맞교환 등으로 총 16% 상당의 우호지분을 확보하며 최대주주인 영풍 측과 경영권 갈등을 겪고 있다.

<황양준 기자>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