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쿠르스크전투와 반공포로석방

2024-08-19 (월) 옥세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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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 5개 기갑여단, 2만에 가까운 핵심 전력을 소리 없이 끌어 모았다. D데이는 2024년 8월 6일. 전차, 야포, 드론 등을 동원해 일제히 국경을 넘어 러시아 영토로 쳐 들어갔다.’

‘공격 목표지역은 우크라이나 동북부 국경너머 러시아본토 쿠르스크 주. 진격 속도는 예상을 뛰어넘었다. 진격 5일째인 8월 10일 일부 부대는 러시아 영토 내로 40km까지 진격했다.’

‘진격은 계속돼 8월 15일 현재 남부 쿠르스크 주의 영토 1,150km(서울 면적의 두 배 정도)를 장악했다. 이 지역 최대도시 수드지시를 비롯해 82개의 마을이 함락됐고 포로가 2,000여명, 러시아 난민은 20여 만에 이르는 것으로 파악됐다.’


‘점령지 질서유지를 위해 우크라이나군은 군 지휘통제소를 열고 장기주둔에 대비하는 한편 진격은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다…’

외신들이 전하는 우크라이나군의 여름 대공세 현황이다. 이 뉴스가 전해지자 우크라이나의 분위기는 일시에 달라졌다. 음울하고, 끔직한 뉴스에만 시달려온 우크라이나 국민의 사기가 일시에 되살아났다고 할까.

이 쿠르스크지역은 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의 나치독일과 스탈린의 소련이 사상 최대의 기갑 전투를 벌인 곳이다. 이 전투에서 패배한 독일군은 이후 동부전선에서 전략적 공세를 펼칠 역량을 완전히 상실한다.

이 여름 대공세는 그러면 81년 전 쿠르스크전투처럼 3년 째 끌어온 우크라이나 전쟁의 향방을 판가름하는 주요 전투로 앞으로 기록될까.

한 달이 채 되지 않는 기간 동안 양 군의 병력 200여만, 전차 6,000여대, 항공기 4,500대라는 가공할 전력이 충돌했던 것이 1차 쿠르스크전투다. 그러니 규모에 있어서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번 여름 대공세는 우크라이나 전쟁의 한 전환점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싱크 탱크 애틀랜틱 카운슬의 진단이다.

쿠르스크 공세는 아직도 진행 중이다. 때문에 장기적으로 어떤 결말이 날지 아직까지는 예측을 불허하고 있다. 그러나 몇 가지 사실은 이미 명백히 드러났다.

러시아 영토에서는 군사작전을 펼치지 않는다는, 2년 반 이상 지켜져 온 터부(taboo)가 깨졌다. 그게 우선 하나다. 우크라이나군의 러시아영토 쿠르스크 기습 점령성공은 푸틴이 그동안 떠들어온 ‘레드 라인’을 조롱거리로 만들면서 푸틴의 정치적 위상에 큰 상처를 입혔다. 동시에 서방이 보여 온 확전 우려는 한낱 기우임을 드러냈다.


이런 사실들을 열거하면서 애틀랜틱 카운슬은 이 2차 쿠르스크전투는 어쩌면 한 이정표가 될 수도 있다는 진단을 내리고 있다.

‘우크라이나의 쿠르스크 공세는 이미 몇 가지 목표를 달성했다.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 공격과 자국영토 보호를 동시에 수행할 수 없고 확전능력도 상실했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툭하면 핵 공격 위협을 해왔다. 이에 따라 서방이 보여 온 러시아의 확전 우려는 근거 없는 기우임이 밝혀졌다.’ 유럽정책 전문지인 세파(CEPA)의 분석이다.

한 마디로 푸틴 체제의 취약성을 다시 한 번 드러나게 한 것이 쿠르스크 공세라는 것이 주요 외신들의 하나같은 지적이다.

‘러시아는 서서히 승리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소모전 양상을 보이자 크렘린이 내세운 내러티브다. 쿠르스크 공세로 수십만의 난민이 발생한 가운데 푸틴은 당황한 기색이 역연하다. 이와 함께 그 내러티브에 펑크가 나면서 전쟁공포가 러시아 사회에 스며들고 있다는 것이 뉴욕타임스의 지적이다.

징집 병들이 전선에 투입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번져가면서 러시아 사회는 저변에 몰려든 용암이 언제, 어디로 분출될지 모르는 그런 분위기로 변해가고 있다는 것.

‘러시아는 2차 대전 이후 자국영토를 외국세력에 빼앗긴 적이 없다. 푸틴은 스스로 도발한 전쟁에서 러시아 영토 일부의 주권을 상실했다. 그 푸틴은 현대판 피터대제가 아닌 러시아제국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운명을 맞을지도 모른다.’ 또 다른 외신의 지적이다.

주요 언론들의 진단은 그렇다고 치고, 전쟁피로감이 쌓이면서 패색이 날로 짙어가고 있었다. 그런 정황에서 우크라이나는 어떻게 쿠르스크 공세를 성공시켰을까. 뒤따르는 질문이다.

관련해 불현 듯 한 이미지가 떠올려진다. 한국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다. 상황은 아주 절박하다. 이대로 휴전이 되면 대한민국은 무방비 상태에서 소련, 중공, 그리고 북한의 안보위협에 그대로 노출된다. 뭔가 비상수단이 없을까.

1953년 6월 18일. 휴전협정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반공포로석방이 단행됐다. 미국의 조야는 경악했다. 그러나 이 사건이후, 그리고 휴전협정이 맺어지기 보름 전 한미방위조약을 체결할 것이라는 한미공동 성명이 발표된다. 절박한 상황에서 대한민국의 안보를 지켜낸 것이다.

전쟁피로감이 만연해간다. 이와 함께 휴전 이야기가 점차 구체화되어가고 있다. 러시아가 점령한 영토를 떼어주고라도 휴전을 성사시키라는 소리가 워싱턴에서도 점차 높아가고 있었다.

그런 상황은 어떻게든 막아야한다. 절박하다. 그 가운데 비밀리에 한 작전이 수립됐다. 러시아영토로 직접 진격하는 쿠르스크 공세다. 어찌 보면 위험하기 짝이 없는 도박이다. 그러나 대성공으로 낙착됐다. 그 우크라이나에 박수갈채를 보낸다.

<옥세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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