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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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유로 VS 600달러

2024-06-13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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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 유 모씨는 얼마 전 미국 여행사를 통해 이베리아 반도를 여행했다. 일정 전체를 안내한 포르투갈인 가이드는 이동 중 틈틈이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정치적 상황과 복지에 관한 이야기들을 들려줬다. 그는 이 두 나라의 의료 시스템이 기본적으로는 전 국민 무상이라며 특히 포르투갈의 의료혜택이 뛰어나다고 자랑했다.

그는 자신은 미국 제약회사가 개발한 브랜드 당뇨 약을 먹고 있는데 약값은 전액 보험으로 처리되고 있으며 보험이 없을 경우에도 50유로면 한 달 치를 구입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 브랜드는 바로 유 씨가 현재 복용하고 있는 처방약. 미국에서는 보험이 없을 경우 한 달 치가 600달러에 육박하는 고가의 브랜드이다. 무려 10배에 달하는 가격 차이가 난다는 얘기다.

유 씨는 메디케어 혜택을 받고 있음에도 이 약을 먹는데 연간 900달러 가까운 코페이먼트를 내고 있다. 그는 “미국의 일부 처방약값이 터무니없이 높은 줄은 알고 있었지만 다른 나라들과 이처럼 차이가 날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유 씨의 푸념은 국가별 약값 비교 연구에서도 고스란히 확인된다. 싱크탱크인 랜드(RAND)연구소가 발표한 ‘세계 처방의약품 가격 비교연구’에 따르면 미국의 약값은 32개 OECD 국가 평균에 비해 2.56배나 높다는 것이다. 특히 처방약의 경우에는 가격이 3.44배 높았다. 한국과 비교하면 미국의 처방약값이 5배가량 비쌌다.

미국의 처방약값이 다른 나라와 비교해 터무니없이 높아진 것은 여러 가지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이다. 무엇보다도 국가를 중심으로 한 단일 의료체계를 가진 다른 나라들과 달리 미국은 민간보험사들과 군소 정부 프로그램들이 개별적으로 제약회사들과 약값 협상을 벌인다. 그러다보니 협상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시장만능주의 영향인지 오랫동안 연방정부는 제약회사 가격 결정에 거의 개입하지 않았다. 시장이 알아서 가격을 결정하라고 거의 방임해 왔다. 그러면서 처방약값의 고삐가 풀리고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아 왔다.

제약회사들이 갖고 있는 특허권은 이들이 터무니없는 가격을 책정하는데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돼 왔다. 의약품과 관련해 특허권에 기초한 독점기간이 있는데 이것은 기본적으로 출원일로부터 20년 동안이다.

행정부는 출범 후 주력 국정과제의 하나로 터무니없이 높은 처방약값 규제를 추진해오고 있다. 이미 연방의회를 통과한 ‘인플레이션 감축법’(Inflation Reduction Act)에 의거해 2026년부터는 메디케어 수혜자들을 위해 고가의 일부 처방약 가격 협상을 할 수 있게 됐다.

이걸로는 부족하다 싶었는지 바이든 행정부는 개발을 할 때 연방정부 기관들의 도움을 받았던 고가의 처방약들에 대해서는 연방정부가 ‘개입권’(march-in rights)을 발동, 가격 규제를 하겠다는 방침을 밝히고 있다. 이런 방침은 지난 1980년 연방의회에서 통과됐던, “연방정부 기금 지원을 받은 지적재산에 대해서는 연방정부도 일부 소유권을 갖는다”는 내용의 법에 근거하고 있다.

다만 이 법을 처방약값 규제에 적용하는 게 타당한가에 대해서는 치열한 법리적 논쟁이 예상된다. 연방정부는 미국에서 연간 16만 달러 이상이 소요되는(하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비교도 안 되게 가격이 낮은) 췌장암 치료제 Xtandi에 대해 개입권을 발동하려다 미 국립의료원(NIH)의 반대에 직면한 바 있다.

처방약값의 가파른 상승은 미국의 의료시스템을 근본적으로 위협하고 있다. 기형적인 처방약값 구조를 개선하려는 바이든 행정부의 노력이 어떤 성과를 거둘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하겠지만 이 작업이 거대한 기득권의 강한 저항에 부딪히게 될 것임은 쉽게 예상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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