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스크리밍 이글’ 챌린지

2024-06-12 (수) 정숙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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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스크리밍 이글’(Screaming Eagle)은 꿈의 이름이다. 나파 밸리 컬트와인의 최고봉이자, 어떤 와인과도 비교를 거부하는 군계일학 같은 와인이다.

스크리밍 이글의 역사는 1986년 나파지역 부동산에이전트 진 필립스가 오크빌(Oakville)에 57에이커의 포도밭을 구입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녀는 거기서 수확한 포도를 다른 와이너리들에 팔았는데 그중 1에이커에서 나온 80그루의 카버네 소비뇽 포도를 선별해 직접 와인을 만들어보았다. 플라스틱 통에서 대충 양조한 ‘거라지 와인’이었다.

당시 빚에 쪼들리고 있던 그녀는 이 와인에 상업성이 있는지 알아보려고 가까운 로버트 몬다비에 샘플을 들고 갔다. 거기서 좋은 반응을 얻자 유명한 와인전문가 리처드 피터슨을 컨설턴트로 영입했고, 바로 이어 그의 딸 하이디 피터슨 배럿(Heidi Peterson Barrett)을 파타임 와인메이커로 초빙한 것이 신의 한수였다. 배럿은 1995년에 첫 빈티지(1992)를 225케이스(2,700병) 출시했는데 이 와인이 로버트 파커로부터 99점을 받으면서 일약 스타로 떠올랐다. (이후 스크리밍 이글은 6회에 걸쳐 RP 100점을 받았다)


1990년대는 나파 밸리에서 컬트와인이 막 출현하던 시기였다. 진하고 풍성한 맛의 카버네 블렌드, 소량 생산되어 희소성 있는 고품질의 와인에 파커가 높은 점수를 부여하면서 특별한 지위가 형성된 와인들이다. 할란(Harlan Estate), 아라우호(Araujo), 브라이언트(Bryant Family), 그레이스(Grace Family), 콜긴(Colgin Cellars), 달라 발레(Dalla Valle), 헌드레드 에이커(Hundred Acre) 등 10~20개의 와인들이 파커의 축복과 함께 컬트와인으로 등극했다.

하지만 스크리밍 이글은 처음부터 이들과는 차원이 다른 명성을 유지했다. 전설이 된 1992 빈티지는 출시할 때 75달러였으나 지금은 수만 달러를 주어도 살 수 없는 콜렉터스 아이템이 되었고, 2000년 나파 밸리 자선경매에서 6리터짜리 한 병(8병의 양)이 50만 달러에 팔려 세계최고 기록을 세웠다.(이 기록은 2018년 소더비 옥션에서 1945 로마네 콩티가 55만8,000달러에 낙찰되면서 깨졌다)

2006년 스크리밍 이글은 큰 변화를 맞았다. ‘컬트 카버네의 여왕’이라 불렸던 배럿이 떠나고, 와이너리는 억만장자 스포츠재벌 스탠 크랑키(Stan Kroenke)와 찰스 뱅크스에게 팔렸다. 인수가격은 공개되지 않았으나 3,000만달러가 넘었다고 재계에서는 전한다. 3년 후 뱅크스가 손을 떼면서 크랑키 단독 소유가 되었다. LA 램스와 덴버 너겟츠의 구단주인 그는 산타바바라에도 ‘호나타’(Jonata)와 ‘힐트’(Hilt)라는 2개 와이너리를 갖고 있다.

현재 스크리밍 이글의 와인메이커는 닉 기스레이슨(Nick Gislason)이며 아직도 7~800케이스의 소량을 회원들에게만 판매하고 있다. 가격은 1995년 125달러, 2006년 300달러, 2010년 850달러, 2021년 1,050달러로 꾸준히 올랐지만 이건 회원가격이고, 이들이 시장에 내놓는 즉시 3배 이상 뛰어오른다. 현재 와인 서처에서 보여주는 평균가격은 병당 4,018달러.

회원 대기자명단이 너무 길어서 최소 12년 이상 기다려야 한다는데 실제로는 훨씬 더 오래 걸리는 모양이다. 2007년에 이름을 올려놓았다는 한 지인은 바로 얼마 전 문의해보니 앞으로도 최소 5년 이상 기다려야 한다는 답변을 들었다고 했다. 그러니까 기존 회원들은 죽기 전엔 절대로 안 나간다는 얘기다. 누가 나가겠는가.

지난 주말, 함께 와인을 즐기는 친지들과 함께 2013년산 스크리밍 이글을 시음하는 기회를 가졌다. 이탈리안 식당에서 프라이빗 룸 하나를 빌려 9명이 모였다. 6코스 디너가 서브되는 동안 샴페인으로 시작해 화이트 와인을 거쳐 2병의 스크리밍 이글을 2시간 정도 디캔팅하여 여유있게 마셨다. 다들 많이 흥분했고 기대감에 들떠있었으니 첫 순배가 돌자 “정말 맛있다”. “처음 느껴보는 맛이다”, “확실히 다르다”는 평가가 쏟아졌다.

개인적으로 무척 궁금했었다. 왜냐하면 스크리밍 이글은 명성에 비해 실제 마셔본 사람이 드물기 때문이다. 대부분 투자 목적으로 소장하고 있거나, 초창기에 나온 것이 이제야 마실 만큼 숙성했기 때문에 컬트와인 중에 마셔본 사람이 가장 적은 와인일지도 모른다.


“카버네 블렌드에서 나올 수 있는 가장 집중된 맛”이라는 것이 첫 모금부터 마지막 모금까지 일관되게 느껴진 나의 테이스팅 노트였다. 향기가 매혹적이고, 곱게 갈려져 통합된 태닌이 부드러웠으며, 오크향이 과도하지도 않았다. 한마디로 과일맛, 산도, 태닌, 근육의 모든 요소가 둥글게 조화되고 하나의 원으로 모아진 강한 와인이었다. 놀라웠던 건 아주 오래 입안에 남는 맛(롱 피니시)으로, 이제껏 마셔본 레드와인 중에서 가장 길었다.

그런데 중요한 건 이러한 미각적 경험이 새로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보르도의 그랑 크뤼, 나파의 컬트 캡, 이탈리아와 호주의 명품와인 등 세상에서 좋다는 와인들을 두루 마셔봤지만 솔직히 그런 와인들보다 몇 배나 더한 맛은 아니었다. 상식적으로 카버네 소비뇽이라는 포도에서 나올 수 있는 맛의 최대치가 어떨까 생각해보면 될 것이다.

비싼 와인에 대해 사람들은 맛이 어떤지, 그 돈만큼의 가치가 있는지 묻는다. 그때마다 항상 하는 말은 “맛과 가격은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100달러 와인보다 1,000달러 와인이 10배나 맛있는 것은 아니다. 이 수준에서 가격을 결정하는 것은 맛이 아니라 수요, 즉 찾는 사람이 많으면 당연히 올라가는 것이다.

아주 작은 차이에도 최상의 맛에 아낌없이 투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 가치를 결정하는 건 각 개인의 상황과 취향에 따라 다른 것이다.

<정숙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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