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0일 오후 5시, 뉴욕 맨해튼 형사법원 1530호에서 “유죄(Guilty)”를 외치는 소리가 34회 들려왔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성추문 입막음 돈’ 재판에서 34개 범죄혐의에 대해 배심원단이 만장일치로 유죄 평결을 내린 것이다.
그날 갑자기 타전된 이 뉴스를 들었을 때 두 가지 점에서 크게 놀랐다. 하나는 예상보다 배심원 심리가 빨리 끝났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12명 전원이 모든 혐의에 대해 유죄라고 판단한 것이다. 법조계 전문가들조차 이처럼 빨리 평결에 도달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고, 기소된 혐의 모두에 “길티” 판단이 나오기는 힘들 것으로 추측했었다.
재판은 6주가 걸렸지만 배심원 평의는 단 이틀, 9.5시간이 걸렸다. 그처럼 짧은 시간에 만장일치에 도달했다는 것은 12명 모두가 트럼프의 유죄를 100% 확신했다는 뜻이다. 트럼프는 재판 내내 자신은 결백하며 포르노배우 스토미 대니얼스를 비롯한 증인들 모두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주장했지만,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는 세상이 다 알고 있었다. 또 트럼프는 맨해튼이 민주성향을 가진 곳이어서 배심원들이 정치적 편견을 갖고 있다고 주장했으나 배심원단은 검찰과 트럼프 변호인단이 함께 신중하게 선택한 일반시민들이었다.
지난 4월초 검찰과 피고 양측은 약 200명의 배심원 후보를 까다롭게 인터뷰했다. 직업, 가족관계, 정치적 견해, 뉴스를 접하는 소스, 소셜미디어 게시물과 취미에 대해 꼬치꼬치 물으며 자기 측에 유리하지 않아 보이는 후보들을 솎아냈다. 최종 선정된 12명과 예비배심원 1명은 성별, 나이, 직업, 출신 및 거주지역에서 다양한 배경을 가졌다. 남자 7명 여자 5명이었고, 백인 흑인 아시안이 섞여있었다. 직업은 교사, 물리치료사, 변호사, 세일즈맨, 투자은행가, 엔지니어, 자산관리매니저, 언어치료사, 제품개발관리자, 전자상거래인 등이었다.
뉴스를 접하는 소스로 뉴욕타임스, CNN 등 진보 매체를 보는 사람도 있었지만 폭스뉴스와 월스트릿 저널 등 우파 미디어를 선호하는 사람도 있었고 5명은 뉴스를 잘 보지 않는다고 했다. 심지어 트럼프의 소셜미디어 ‘트루스 소셜’을 팔로우 하는 등 그에 대해 호의적인 의견을 숨기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자신이 재판에서 증거만을 바탕으로 합리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다고 주장하며 배심원 선서를 마쳤다.
이 때문에 공정한 평결이 나오기 힘들 거라는 우려가 있었다. 대선을 5개월여 앞둔 시점, 트럼프와 바이든, 공화당과 민주당이 전쟁상태인 현 상황에서 검찰이 제시하는 혐의사실과 증인들의 증언만으로 바른 판단이 내려질지, 회의적 견해도 많았다. 배심원 판결은 만장일치여야 하는데 트럼프를 지지하는 단 한명이라도 우기면 불일치 배심(hung jury)으로 무죄가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34개 혐의 모두 유죄” 선언은 이런 상황과 조건에서 내려진 공정하고, 기념비적이고, 역사적인 평결이다. 배심원 전원이 검찰의 기소에 대해 움직일 수 없는 증거들을 보고 듣고 확인한 결과다. 즉, 트럼프가 2016년 대선 선거운동 당시 과거 혼외정사를 가진 여성의 입을 막기 위해 13만 달러를 지급한 뒤 이를 법률비용으로 위장함으로써 유권자를 속이고 대선을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끌어갔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현장에서 재판을 지켜본 미디어들에 따르면 배심원들은 지난 6주 동안 완전히 무표정한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이들이 어떤 결정을 내릴 것인지 도무지 짐작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심리에 돌입한지 10시간도 안 돼 만장일치 유죄평결을 내렸다. 이들을 영웅이라고 치켜세워도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다.
그런데 이번 재판의 영웅은 이들 뿐만이 아니다. 이 재판의 최종적인 승자는 앨빈 브래그 맨해튼 지방검사장이라고 법조계는 입을 모은다. 흑인 최초의 맨해튼지검장 브래그는 2022년 취임하면서 전임자로부터 수년간 묵힌 트럼프의 각종비리 수사를 물려받았고, 이 가운데 성추문 입막음 돈을 회사비용으로 지급한 부분에 집중하게 되었다. 기업의 문서조작은 경범죄이지만 이것이 2016 대선에서 그의 범죄를 덮기 위한 방편으로 사용된 것은 중범죄임을 찾아내 작년 3월 기소했다. 기소는 일반시민들로 구성된 대배심이 결정했지만 이들을 설득한 것은 그의 공이었다.
트럼프 지지자들로부터 살해협박을 받으면서도 그의 수사팀은 집요하게 의혹을 파헤치고 복잡한 사건을 배심원단에게 효과적으로 전달, 결국 유죄 평결을 받아냈다. 미국 역사상 전 현직 대통령을 형사 기소한 첫 검사장이자 유죄 평결을 끌어낸 첫 검사장으로서 “브래그의 완전한 승리”라는 평가가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또 한 사람의 영웅이 있다. 이번 재판을 주재한 후안 머천 판사다. 그는 ‘전직 대통령의 형사재판’이라는 대단히 부담스런 법정을 주재하면서, 또 트럼프 지지자들로부터 그와 가족에 대한 악의적인 공격이 계속되는 와중에도 검찰과 변호인과 배심원들이 공정한 재판을 치를 수 있도록 모든 단계에서 냉정하고 침착한 태도를 유지했다. 이번 재판이 ‘판사들의 매스터클래스’였다고 불리는 이유다.
트럼프는 3개의 재판을 남겨놓고 있다. 국회의사당 폭동선동(4개 혐의), 기밀문서 유출(40개 혐의), 조지아주 선거개입(10개 혐의) 등이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부디 이 재판들에서도 미국의 법치가 실현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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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희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