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루저 도널드와 정의의 승리

2024-06-04 (화)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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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미국으로 이민와 처음 겪어보는 제도 중 대표적인 것이 아마 배심원제일 것이다. 배심원 제도를 채책하고 있는 것은 대부분 영미법 국가들인데 그것은 배심원제가 영국의 주도 세력이자 미국인들의 조상인 앵글과 색슨족이 속한 게르만족의 전통 관습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1215년 가톨릭 교회가 ‘고문에 의한 판단’을 금지하면서 영국에서 배심원의 역할은 더욱 커졌다. ‘고문에 의한 판단’이란 범죄 혐의가 있는 용의자에게 고문을 가해 상처가 빨리 나으면 이는 하나님이 그를 돕고 있는 것이므로 무죄고 빨리 낫지 않으면 버림 받은 것이기 때문에 죄인으로 판단하는 방식을 말한다.

지난 주말 루저 도널드가 또 다시 졌다. 이번에는 맨해튼의 형사 법정에서다. 7명의 남성과 5명의 여성으로 구성된 배심원들은 루저 도널드가 2016년 포르노 배우와의 스캔들이 터지는 것을 막기 위해 13만 달러를 주고 입을 막은 후 이를 변호사 비용인 것처럼 장부를 조작한 혐의 34건에 대해 모두 유죄로 평결했디.


이 중 한 사람만 반대해도 루저 도널드는 무죄 평결을 받았을 것이며 그렇게 됐더라면 검찰은 다시 항소하지 못하고 재판은 끝났을 것이고 루저 도널드와 그 지지자들은 기고만장해 만세합창을 했을 것이며 그것으로 이번 대선은 끝날 수도 있었다.

2021년 연방 의사당 난입 선동, 국가 기밀 반출 및 미반환, 2020년 대선 조지아 선거인단 선출 개입 등 루저 도널드가 기소된 네 사건 중 이번 케이스는 가장 사안이 경미하고 유죄 평결을 받기 어려울 것이란 게 중론이었다. 단순 장부 조작은 경범죄로 이미 시효가 만료됐고 이것이 다른 범죄를 저지르기 위한 수단이었음을 별도로 입증해야 하는데 이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었다.

반면 네가지 사건 중 올 대선 중 결과가 나올 수 있는 것은 이 사건이 유일했다. 의사당 난입은 연방 대법원이 대통령의 면책 행위에 대한 심리를 수용함으로써 재판이 언제 시작될 지 알 수 없는 형편이며 기밀 문서 유출 사건은 담당 판사의 이해할 수 없는 재판 지연으로 계속 늦어지고 있고 조지아 사건은 검사의 난데 없는 불륜 스캔들로 역시 신속한 재판이 어렵게 됐기 때문이다.

이번 재판 결과가 나오자 루저 도널드는 아무 근거 없이 “이번 재판은 바이든 행정부가 정적에게 상처를 주기 위해 벌인 일”이라고 주장했는데 늘 그렇듯 이는 사실과 다르다. 이번 유죄 평결을 내린 것은 판사도 검사도 아닌 우리와 똑같은 평범한 동료 시민이었기 때문이다.

루저 도널드는 처음부터 포르노 배우 스토미 대니얼스와 성관계를 맺은 사실조차 없다고 부인했는데 이는 전직 대통령이자 차후 대통령이 될 수도 있는 사람을 상대로 일개 포르노 배우와 한 때 그의 최측근 고문 변호사 마이클 코언과 절친이었던 ‘내셔널 인콰이어러’ 발행인 데이빗 페커가 일관되게 거짓 진술을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12명의 배심원들은 이런 루저 도널드보다는 이들 3명의 주장이 훨씬 믿을만한 것으로 본 것이다.

루저 도널드는 또 이번 평결을 내린 배심원들은 정치적 편견을 가진 인물들이라며 재판 장소를 옮겨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는데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를 허용하면 피고인은 아무데나 자기가 유리한 곳에서 재판을 받을 수 있게 된다. 수정 헌법 6조가 재판은 범죄가 일어난 “지역”에서 받게 한 것도 그 때문이다.

일부에서는 선거가 있는 해이니만큼 기소하지 말고 국민들의 심판에 맡기는 것이 옳았다는 주장을 펴기도 하지만 어불성설이다. 후보자가 사람을 죽였는데 선거 결과를 지켜본 후 재판을 하자는 것이 말이 되는가.

또 일부에서는 이번 재판 결과가 오히려 루저 도널드에게 유리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며 재판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우기는데 이 또한 잘못이다. 이번 결과 중도층의 이탈을 부를 것이란 주장과 지지층의 결속을 부를 것이란 주장이 맞서고 있으나 누가 맞는지는 선거날이 돼 봐야 알 것이다. 선거는 선거고 죄는 죄다. 선거에 출마했느냐 여부를 죄가 있느냐 여부와 연결시키는 것은 ‘법 앞의 평등’이라는 대원칙에 어긋난다.

어쨌든 이번 평결로 배심원제가 어째서 민주주의의 마지막 보루로 불려지는지가 입증됐다. 대통령 등 권력자가 임명한 검사와 판사에 의해 유무죄 여부가 가려졌다면 그야말로 정치 재판이었다는 비난을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제 루저 도널드에 대한 사법적 판단은 내려졌고 남은 것은 미국 국민들의 판단뿐이다. 과연 미국민은 역사상 첫 중범자를 대통령으로 뽑을 것인가.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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