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믿고 보는 오페라 ‘투란도트’

2024-05-22 (수) 정숙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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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오페라 아리아는 ‘네순 도르마’이다. 오페라를 잘 모르거나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이 노래는 모두 안다. 선율이 감미롭고 로맨틱해서 테너들의 애창곡이요, 아마추어 오디션에서도 단골 레퍼토리로 나온다.

그런데 이 ‘네순 도르마’가 어느 오페라에서 나오는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재미있는 오페라 퀴즈감이다. ‘공주는 잠 못 이루고’가 아니라 ‘아무도 잠들지 말라’는 뜻의 ‘네순 도르마’(Nessun Dorma)는 자코모 푸치니의 ‘투란도트’ 3막에 나오는 승리의 노래다.

아리아는 그토록 유명하지만 오페라 ‘투란도트’는 자주 공연되지 않고, 따라서 스토리를 아는 사람도 많지 않다. 공연이 드문 이유는 작품 스케일이 워낙 크기 때문이다. 출연진, 코러스, 오케스트라, 세트와 의상과 조명이 모두 크고 화려한 그랜드오페라여서 (한마디로 돈이 많이 드는 프로덕션이라) 쉽게 올릴 수 없는 것이다.


푸치니의 오페라는 ‘라보엠’ ‘토스카’ ‘나비부인’이 가장 인기 있고 자주 공연되지만 나는 ‘투란도트’를 가장 좋아한다. 공연을 처음 본 것이 라이브가 아니라 뉴욕 메트오페라의 온라인 스트리밍을 통해서였는데도 단숨에 매혹되었다. 메트는 2020년 3월 팬데믹이 시작됐을 때 아카이브에 쌓여있던 오페라 동영상들을 매일 한편씩 무료로 내보냈다. 그 다음해 7월말까지 약 500일 동안 수백편의 공연이 올라왔는데 그때 ‘투란도트’를 네 번이나 보았다. 그리고 당시 기록해두었던 오페라 일기를 보면 매번 이 오페라에 대해서만은 ‘재미있다, 인상적이다, 극적이다, 매력적이다…’ 등등 후한 감상평을 써놓은 것을 볼 수 있다.

고대 중국의 북경이 배경인 ‘투란도트’는 푸치니의 마지막 오페라이자 미완성 작품이다. 푸치니는 3막 중간부분까지 작곡한 후 후두암으로 사망, 후배 프랑코 알파노가 완성하여 1926년 라 스칼라에서 초연됐다. 잔혹동화처럼 비극 속에 희극과 서정을 결합시킨 걸작으로, 음악도 중국풍의 선법을 많이 사용해 전통 오페라와는 분위기가 크게 다르다. 페이스도 빠르고 징과 북이 자주 크게 울리면서 극적인 긴장감을 부추긴다.

간단한 줄거리는 이렇다. 옛날 옛적 중국에 투란도트라는 공주가 살았다. 누구든 한번 보면 매혹되는 절세미녀, 그러나 차갑고 냉혹하기 이를 데 없는 ‘얼음공주’다. 그녀는 청혼하는 모든 남자에게 세가지 수수께끼를 내는데, 이를 풀면 결혼할 수 있지만 풀지 못하면 즉시 처형된다. 그동안 수수께끼에 도전했다가 참수된 청년들의 목이 거리에 숱하게 걸려있다.

어느 날 칼라프라는 왕자가 먼발치에서 투란도트를 보고 홀딱 반해 수수께끼에 도전한다. 그리고 마침내 3개의 문제를 모두 맞힌다. 그러나 당황한 공주가 그와의 결혼을 거부하자 이번에는 칼라프가 공주에게 문제를 낸다. 이튿날 아침 날이 밝기 전까지 자신의 이름을 말하라는 것. 공주가 알아내면 자신은 기꺼이 죽을 것이고, 못하면 자신과 결혼해야한다는 조건이다.

공주는 그날 밤 백성과 신하들에게 아무도 잠들지 말고 그의 이름을 알아오라고 명령한다. 못 알아내면 모두 죽는다는 추상같은 호령이다. 궁전 안팎에서 난리와 소동이 메아리치는 가운데 칼라프가 달빛 아래 홀로 서서 노래를 부른다. ‘네순 도르마~ 네순 도르마~’

“아무도 잠들지 말라! 아무도 잠들지 말라! 당신도 공주여, 그대의 차가운 침방에서 별을 보시오… 나의 비밀은 내 안에 숨어있고 아무도 내 이름을 모를 것이오. 아니, 여명이 밝으면 그대 입술에 내가 말해주리다. 그러면 내 입맞춤이 침묵을 녹이고 그대는 내 것이 될 것이오.

”이렇게 흥미진진한 ‘투란도트’를 지난 18일 LA오페라가 도로시 챈들러 파빌리온에서 개막했다. 2002년 공연한 이후 무려 22년 만에 처음 무대에 올린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메트 프로덕션에 비해 미흡한 점이 적지 않지만 그래도 보고난 총평은 역시 “재미있다”였다.


이번 LA오페라 공연에서 투란도트 역은 소프라노 안젤라 미드, 칼라프 역은 테너 러셀 토마스, 그리고 비련의 노예 리우 역에는 관쿤 유가 열연했다. 완벽한 캐스팅은 아니었지만 오랜만에 만나는 대작의 기쁨과 감상을 방해할 정도는 아니었다. 기대했던 ‘네순 도르마’ 역시 파바로티 만큼은 아니었지만(그 누가 견줄 수 있으랴) 커튼콜에서 기립박수를 받을만 했다.

사실 이번 공연의 스타는 데이빗 호크니라 해야할 지도 모르겠다. 생존한 최정상 화가인 호크니에 대해서는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영국 출신이지만 캘리포니아의 밝고 생동감 넘치는 풍경을 독창적으로 화폭에 담았던 그는 수차례 오페라무대의 세트 제작에도 참여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투란도트’였다. 1991년 샌프란시스코오페라와 시카고 리릭오페라가 공동위촉한 이 프로덕션은 미국과 세계 여러 곳에서 공연된 후 샌프란시스코에 보관돼 있다가 이번 LA 공연을 위해 옮겨와 조심스럽게 복원되었다.

호크니 특유의 빨강 파랑 녹색의 대담한 색상, 단순하게 도려낸 곡선과 직선의 형태들이 겹겹이 층을 이룬 강렬한 추상화 같았다. 황실의 화려한 의상들조차 주눅들 정도로 강렬했다. 세트가 너무 앞쪽에 설치돼 무대가 살짝 답답해 보이는 느낌은 있었지만 수백개의 날카로운 조명이 이를 보완했다. 128명의 공연자와 86명의 오케스트라 포함, 342명이 동원된 공연이다.

제임스 콘론이 지휘하는 음악은 언제나 그렇듯 완벽했고, 오페라 내내 중요한 역할을 하는 코러스도 훌륭했으며, 왕궁의 대신들 핑, 팡, 퐁의 희극적인 활약도 눈부셨다. 한인 테너 줄리어스 안이 퐁으로 출연한다. LA오페라의 ‘투란도트’는 6월8일까지 5회 공연이 남아있다.

<정숙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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