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유로파 프로젝트

2024-05-15 (수) 정숙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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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포스 산의 최고신 제우스는 호색한으로 유명하다. 아내 헤라의 질투와 방해와 복수에도 불구하고 기막힌 변신술을 부리며 수많은 여신, 요정, 인간여성들을 겁탈했다.

헤라의 여사제 ‘이오’를 탐했을 때는 구름 속에 숨어 사랑을 나누다가 헤라에게 발각되자 이오를 암소로 변신시켰다. 꽃을 따러 나온 ‘에우로페’를 보고는 멋진 황소로 변해서 접근, 그녀를 등에 업고 크레타로 납치해 사랑을 나눴다. 아르테미스의 님프였던 ‘칼리스토’는 여신의 모습으로 찾아온 제우스에게 당한 후 헤라의 저주로 곰이 되었다. 제우스는 또 백조로 변해서 ‘레다’의 품을 파고들었고, 황금비가 되어 ‘다나에’를 안았으며, 독수리로 변신해 미소년 ‘가니메데’를 납치한 뒤 자신의 옆에 두고 술을 따르게 했다.

태양계에서 가장 큰 행성인 목성에 주피터(제우스의 로마이름)란 이름을 붙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목성은 태양계에서 가장 먼저 형성된 맏이행성이고, 나머지 행성들(수금지화천해)을 모두 합친 질량의 2.5배나 되는 거대행성이며, 천둥과 번개의 신인 제우스처럼 무시무시한 폭풍과 천둥번개를 계속 일으키고 있는 개스 행성이기 때문이다.


또 목성 주변에는 수많은 위성이 돌고 있는데, 제우스가 농락한 숱한 여성들이 그와 얽힌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했듯 주피터의 중력에 묶인 위성은 지금까지 발견된 것만 95개에 달한다. 지구가 단 한 개의 달을 갖고 있는 것과 비교하면 그 중력이 얼마나 큰지 짐작할 수 있겠다.

이런 목성의 탐사를 위해 1973년부터 ‘파이오니어’, ‘보이저’, ‘카시니’, ‘뉴 호라이즌스’ 등 나사(NASA)가 보낸 우주선들이 근접통과하며 많은 정보를 전해왔고, ‘갈릴레오’는 1995부터 8년간 목성을 공전하며 더 자세한 사진들을 보내주었다. 그리고 2016년 드디어 ‘주노’(헤라의 로마이름)가 목성궤도에 도착,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엄청난 방사능 폭풍을 견뎌내며 지금껏 임무를 수행중이다. 늘 남편을 감시하고 그의 비행을 찾아낸 헤라처럼 주노는 2025년까지 목성의 구름 속(!)을 들여다보며 감추고 있는 비밀을 하나하나 밝혀낼 것이다.

그런데 현재 천문학계가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위성들이다. 목성의 위성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갈릴레오 갈릴레이로, 무려 400여년 전인 1610년 자신이 만든 굴절망원경을 통해 4개를 찾아냈다. ‘갈릴레이 위성’으로 통칭되는 이 위성들은 가까운 거리 순으로 이오, 유로파(에우로페), 가니메데, 칼리스토라 불린다.

학자들이 특히 ‘갈릴레이 위성’들에 주목하는 이유는 기체행성인 모행성과는 달리 암석과 얼음행성이기 때문이다. 이오에서는 화산활동이 활발하고 유로파, 가니메데, 칼리스토는 꽁꽁 얼어붙은 얼음지각 아래 바다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물이 있다는 것은 곧 생명체의 존재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고, 현재 그 가능성이 가장 높은 위성이 유로파다.

달보다 크기가 약간 작은 유로파는 얼음지각 밑에 100km 깊이의 염분 바다가 존재하며 그 물의 양은 지구 바다의 2배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 대기층에서 탄소, 수소, 질소, 산소가 확인되었고, 최근에는 얼음지각 밑에서 화산활동이 일어나고 있다는 증거가 나오면서 점점 더 생명체 존재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이에 따라 나사는 오는 10월10일 오랫동안 준비해온 ‘유로파 클리퍼’(Europa Clipper)를 쏘아 올린다. 6년을 날아가 2030년 도착하게 될 이 탐사선은 2년반 동안 유로파를 45회 근접비행하면서 얼음지각의 정확한 성분과 지도, 방사능 환경을 조사할 예정이다. 그 결과를 바탕으로 나사는 훗날 착륙선을 보내 얼음 층을 뚫고 바다 속까지 탐사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그런데 이 계획은 2013년 영화 ‘유로파 리포트’의 내용을 그대로 빼닮았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굉장히 지적이고 아름다운 이 영화는 인류최초의 유로파 탐사대 6명의 이야기를 그린 우주 SF스릴러다. 긴 우주여행 끝에 유로파에 도착한 대원들, 온통 얼음뿐인 유로파의 아름다움, 얼음지각을 뚫고 들어간 바다 속 신비에 넋을 잃지만 관제센터와 통신이 끊기고 우주선의 기계결함 등 예기치 못한 사고로 하나둘 생명을 잃는다. 마침내 미지의 생물체가 출현했을 때 보여주는 마지막 생존자의 용기… 영화적 상상력보다는 다큐 리포트 형식의 사실적 묘사로 몰입감을 극대화시킨 작품이다.

오는 10월 떠나는 무인탐사선 ‘유로파 클리퍼’는 특별한 선물을 하나 안고 간다. 보이저 1호와 2호가 지구의 타임캡슐 ‘황금 레코드’를 싣고 갔듯이 유로파에도 지구의 메시지를 담은 플라크를 장착한 것이다. 극심한 방사능에 부식되지 않도록 특수재질로 제작된 삼각형 판에는 인류의 메시지가 3D로 담겨있으며, 지구와 유로파의 공통성분인 ‘물’을 103개국 언어로 녹음해 수록했고, 미국 계관시인 에이다 리몬이 쓴 ‘유로파를 위한 시’도 새겨져있다.

에우로페는 제우스가 가장 사랑했고, 헤라에게 수난당하지 않은 유일한 여성이었다. 그녀는 크레테 섬에 정착해 제우스의 세 아들을 낳았고 훗날 여왕이 되었으며 아들 미노스왕은 서양문명의 근원인 그리스 문명의 시조 미노아 문명을 키웠다. 그녀가 황소를 타고 돌아다닌 지역이 유럽(Europe)이 되었다. 2유로 동전에 황소 위에 앉아있는 에우로페의 모습이 새겨진 이유다. 나사의 유로파 프로젝트가 새로운 ‘우주문명’의 시작이 될 수 있을지, 인류의 염원과 호기심이 어느 때보다 높다.

<정숙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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