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는 동등한 힘을 가진 국가 간에만 가능한 것이다. 힘이 없을 때 정의는 한낱 아름다운 수사에 지나지 않는다. 신들의 세계에서도 강력한 신이 약한 신을 지배한다.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것은 자연의 법칙이다.’
기원전 5세기 고대 그리스에서 스파르타와 패권을 다투던 아테네는 작은 섬나라 밀로스가 중립을 지키려 하자 정의가 아닌 현실을 택하라며 이런 요지로 설득한다. 밀로스인들이 700년 동안 누린 자유를 포기할 수 없다며 항복을 거부하자 아테네는 밀로스의 모든 성인 남자들을 죽이고 여자와 아이들은 노예로 팔아버린다. 국제 관계의 냉혹한 현실을 보여주는 투키디데스의 고전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 나오는 대목이다.
최근 미국·프랑스 대학가는 친 팔레스타인 시위로 몸살을 앓고 있다. 팔레스타인 무장 단체 하마스의 잔악한 민간인 공격에도 동정론이 큰 것은 이스라엘의 전쟁범죄에 대한 증거가 차고 넘치기 때문이다. 든든한 뒷배인 미국 정부마저 인권침해를 일삼는 이스라엘 극우파 부대들을 제재하겠다고 나설 정도다. 하지만 ‘생존을 위해 잔학 행위마저 부끄러워하지 않는 국가’라는 신화는 때로 국제적인 ‘존경’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4·10 총선은 국제 관계처럼 정의가 아니라 힘의 논리가 판을 친 선거였다. ‘윤석열 심판론’이 ‘이·조(이재명·조국) 심판론’을 누르고 압승했다. 법원에서 실형을 받은 범법자와 온갖 막말을 일삼은 더불어민주당 계열 후보들은 강성 지지층의 돌격대를 자처해 공천을 받아 금배지를 달게 됐다. 유권자들이 도덕적 불감증에 빠졌다기보다는 윤석열 대통령의 국정 비전 부재와 독선적 통치 스타일에 대한 반감이 더 컸던 것이다.
우리 사회는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계층 간 양극화가 심화하는 가운데 저출생·고령화와 노인 빈곤, 저성장 장기화 위험, 감당할 수 없는 집값과 사교육비 등 온갖 문제들을 안고 있다. 더 큰 문제는 해결의 희망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팍팍한 현실에서 미래 비전마저 사라질 때 사람들은 원인을 상대방 탓으로 돌려 분노를 표출하기 쉽다. ‘이번 총선은 분노가 도덕을 이긴 선거’라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윤 대통령은 “상식과 공정의 원칙을 바로 세우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와 안철수 의원 등 비주류를 내치거나 김건희 여사 논란, 해병대원 순직 사건 등을 대하는 과정은 상식과 공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특히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화두가 시효를 다한 가운데 앞으로 대한민국을 어떻게 이끌고가겠다는 것인지 대체 알 수가 없다.
노동·교육·연금 3대 개혁은 방향은 맞지만 수단에 불과할 뿐 그 자체로 국가 어젠다인지는 의문이다. 이 개혁들은 역대 정부에서도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한 과제다. 이해관계자들의 반발이 극심하기 때문이다. 정권이 국가적 비전을 설정한 뒤 3대 개혁을 이루면 나라의 운명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청사진을 제시하고 국민들을 설득해야 겨우 성공할 수 있는 작업이다.
담아야 할 시대적 가치와 로드맵이 부족하다 보니 3대 개혁 작업도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노동 개혁은 ‘건폭(건설폭력)’ 철퇴 등 노조의 부당 행위 단속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교육 개혁은 ‘일타 강사’와 대형 학원 때려잡기에 그치고 있다. 노동 유연성 강화, 공교육과 대학 교육 정상화라는 본질적인 영역은 손도 못 대고 있다. 연금 개혁은 정부가 국회에 책임을 미루는 바람에 ‘조금 더 내고 훨씬 더 많이 받는’ 안으로 개악되거나 무산될 상황에 처했다. 정권의 무능함과 오만함에 국민들이 환멸을 느끼는 사이 야당은 ‘보편적 복지’와 ‘기본소득’으로 포장한 무차별 돈 살포 정책으로 유권자들의 환심을 사는 데 성공했다. 국가 재정을 거덜 내고 미래 세대에 빚만 물려주는 정책인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있다.
이제라도 보수 세력은 시대적 요구에 맞는 지속 가능한 어젠다를 내놓고 야당과 구체적인 정책·비전 경쟁을 벌여야 한다. 대통령과 여당이 뼈를 깎는 자기 혁신에 실패한다면 최대 피해자는 기성 보수 세력이 아니라 미래 세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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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형욱 서울경제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