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발아래 파도도 눈앞에 초록도…섬, 너에게 발이 묶였다

2024-05-03 (금) 흑산도(신안)=글 최흥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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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안 흑산도의 보물, 장도와 영산도

섬 안에 섬이 있고, 섬 밖에도 섬이 있다. 목포에서 쾌속선으로 2시간 거리에 위치한 신안군 흑산면은 사람이 살고 있는 유인도 11개와 여러 무인도를 포함해 100여 개 섬으로 구성된다. 흑산군도라 부르는 이유다. 목포에서 흑산도까지 약 90㎞, 흑산도에서 가거도까지 또 70㎞가 넘는다. 주변 해역을 포함하면 단연 국내에서 면적이 가장 넓다. 흑산군도 여행은 가장 큰 흑산도와 약 20㎞ 떨어진 홍도를 중심으로 이뤄지는데, 흑산도 바로 인근에도 장도, 다물도, 대둔도, 영산도 등의 유인도가 호위하듯 흩어져 있다. 교통이 불편해 찾는 사람이 거의 없지만 그만큼 신비로움을 간직한 장도와 영산도를 소개한다. 둘 다 30명 정도 거주하는 작은 섬이다.

■해발 230m 섬 봉우리에 람사르습지

장도는 흑산도에서 서북 방향으로 손에 잡힐 듯 보이는 섬이다. 흑산항에서 배로 20분 남짓 걸린다. 항구를 빠져나간 도선은 하얀 등대가 세워진 작은 바위섬을 거쳐 물살을 가른다.


왼편은 흑산도 상라산에서 떨어진 거친 해안 절벽이고, 오른편은 장도에서 띠처럼 연결된 소장도가 이어진다. 소장도는 인간의 간섭이 없는 무인도인데도 나무 한 그루 보이지 않는다. 거센 바닷바람이 그대로 훑고 지나는 섬이다.

장도 선착장이 가까워지면 수직에 가까운 가파른 산줄기 아래 바닷가에 둥지를 튼 마을이 보인다. 주황색 계열 지붕이라 초록이 오르는 산자락과 선명하게 대비된다. 평지가 전혀 없어 집들은 좁은 골목을 형성하며 층층이 자리 잡았다. 척박한 삶터인데 모든 집이 바다 조망이 가능한 구조이니 여행객의 눈에는 그저 낭만적으로만 보인다.

외지인이 이 섬을 방문하는 이유는 단 하나, 해발 230m 섬 정상부에 형성된 습지를 탐방하기 위해서다. 장도습지는 2003년 7월 한국조류보호협회 목포지회 학술조사단에 의해 처음 알려진 후 이듬해 8월에 환경부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됐다.

다음 해 3월 강원 인제의 대암산 용늪, 경남 창녕의 우포늪에 이어 국내 세 번째로 람사르습지에 등록됐다. 보기 드물게 작은 섬 꼭대기에 형성된 습지여서 생태적으로 그만큼 귀한 대접을 받는다.

습지는 산꼭대기 부근 완만하게 비탈진 산지에 위치하고 있다. 유기물 함량이 많은 퇴적층이 사시사철 풍부하게 물을 머금고 있을 뿐 아니라, 수질 정화기능까지 뛰어나 들짐승과 날짐승이 서식하기에 안락한 환경이다. 멸종위기야생동물인 매와 수달, 솔개와 조롱이를 포함한 다양한 동물이 장도습지를 터전으로 살아가고 있다.

장도 선착장에서 습지까지는 채 1㎞가 되지 않지만, 워낙 가파른 길이라 족히 20분은 잡아야 한다. 마을 뒤편부터 바로 목재 덱 탐방로가 시작된다. 한 걸음 한 걸음 오를 때마다 마을 앞바다는 점점 짙어지고 넓어진다. 잠잠한 옥빛 바다에 전복양식 시설이 설치돼 있고, 마을 북쪽으로 소장도의 여러 섬들이 작지만 웅장한 자태를 드러낸다.

바다가 시원하게 내려다보이는 길을 조금만 걸으면 팔각정 전망대가 나타난다. 주변에 넓게 분포한 대숲에 바람이 일렁거린다. 서걱거리는 댓잎 소리와 맑은 새소리가 산중 습지에 울려 퍼진다. 대숲 아래 흥건하게 물이 고인 땅에서는 버들가지가 움트고, 위쪽 경사면엔 검푸른 동백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작은 섬마을 뒤에 감춰진 바위 비경, 영산도

영산도는 흑산도를 기준으로 장도 반대편에 위치한다. 과거 영산화가 많아 그리 불렀다고도 하고,산세가 신령스러워 영산도라 했다는 말도 있다. 역시 흑산항에서 배로 20분 남짓 거리다. 2012년 다도해국립공원의 ‘명품마을’로 선정돼 기대가 부풀었는데, 막상 선착장에 들어서니 ‘여기가 왜?’라는 의문이 생긴다. 겉보기에 장도에 비해 한없이 평범한데 바위 절벽에 커다랗게 ‘명품마을’ 팻말이 걸려 있다.

약간의 실망감을 안고 마을로 발길을 옮긴다. 옴폭한 포구 안쪽에 자그마한 해변이 있고, 그 뒤로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100m 남짓한 해변에 모래가 하얗게 눈부시고, 에메랄드 물 빛깔이 유난히 곱다. 해변 뒤로 시선을 올리면 높지 않지만 우락부락한 바위산이 마을을 포근히 감싸고 있다.

볕이 잘 드는 봉우리라 된볕산이라 부른다. 연두색이 번지는 산자락과 어우러진 아담한 해변과 마을이 큰 바다에 고립된 섬처럼 낯설고 이국적이다.

그래도 ‘명품마을’이라기엔 뭔가 부족하다 싶은데 투명한 바닷물에 숭어가 떼를 지어 이동하고 있다. 해변으로 가까이 다가가면 살짝 멀어졌다가 아무 일 없다는 듯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한동안 넋을 놓고 바라보는데 은빛 몸매를 뽐내는 물고기가 여기저기서 뛰어오른다. 숭어가 뛰니 망둥어도 뛴다는 비유가 그래서 나온 걸까.

숭어가 수면 위로 뛰어오르는 건 몸에 붙은 기생벌레를 떼어내기 위한 행동이라고 한다. 어찌 보면 절박한 몸부림인데, 옥빛 바다에서 펄떡거리는 모습이 싱그럽고 기운차다.

숭어 떼의 유영은 6월 초까지 볼 수 있다고 한다. “건져 올려놓으면 동네 고양이도 발로 툭 차버려요. 하하.” 최성광 마을 이장이 이 물고기의 값어치를 한마디로 정의한다. 영산도 여행객은 덕분에 뜻밖의 선물을 받았다.

선착장에서 가까운 절벽에는 석곡이 드문드문 자라고 있다. 바위나 나무에 붙어 사는 난초과 상록식물로 멸종위기종으로 분류돼 있다. 옛날에는 바위 절벽을 빼곡하게 덮고 있었는데, 외지인이 하나둘 캐 가는 바람에 이제는 영산도에서도 귀한 식물이 됐다.

맞은편에는 2021년 폐교된 흑산초등학교 영산분교장 건물이 있다. 학교는 문을 닫았지만 마지막으로 졸업한 바다, 연진, 효경 세 학생의 이름은 ‘전교1등’ 도서관으로 남았다. 학년마다 한 명만 있었으니 1등을 놓칠 수가 없다. 도서관은 현재 마을 책방으로 운영되고 있다. 정겨운 돌담길을 따라 약 10여 분만 걸으면 마을 탐방이 끝난다. 선착장 위 전망대에 오르면 해변과 마을이 한눈에 담긴다.

영산도의 진짜 명품은 섬 반대편에 숨겨져 있다. 작은 배로 섬을 한 바퀴 도는 선상투어(인당 1만5,000원)로만 볼 수 있는 비경이다. 포구를 빠져나간 배는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며 구석구석 바위 절경을 찾아간다. 모양 그대로의 코끼리바위를 시작으로 하늘로 구멍이 뚫린 용생암굴, 일제강점기 섬 젊은이들이 강제징용을 피해 숨었다는 파수문 등 기기묘묘한 바위 군상이 이어진다. 소형 어선이라 가까이까지 접근해 생생하게 관찰할 수 있고, 바다가 잠잠하면 갯바위에 상륙해 거북손과 홍합 등을 딸 수도 있다.

<흑산도(신안)=글 최흥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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