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F ‘피클볼 전쟁’
▶배우기 쉽고 안전·네트워킹에 용이
▶팬데믹 계기 美 인기 스포츠로 성장
▶월 평균 100개 이상 코트 새로 생겨
▶ 피터슨 부부 “코트 소음 탓 고통”
▶시에 운영 중단 청원, 이웃들도 지지
▶갈등 끝 17년 살던 저택 팔고 떠나
▶“주거지와 300m 떨어져 코트 설치…신중한 도시 계획으로 해결해야”
▶소음 절반 줄이는 패들도 개발중
“탕, 탕, 탕.”
토요일이었던 20일 오전 7시 30분(현지시간)쯤, 미국 캘리포니아주(州) 새너제이의 폴 무어 공원에 다다르자 둔탁한 ‘탕’ 소리가 연이어 귀를 때렸다. 10m 정도 떨어진 곳에서도 선명히 들리는 이 소리는 요즘 실리콘밸리의 많은 사람이 빠져있다는 ‘피클볼’(pickleball) 공이 패들(채)에 닿을 때마다 내는 타격음이었다. 피클볼 패들은 탁구채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크기는 약간 크다.
이른 오전이었음에도 피클볼 코트 6개 중 5개에서는 경기가 한창이었다. 원래 폴 무어 공원에는 테니스 코트만 4개 설치돼 있었는데,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피클볼 인구가 급증하면서 새너제이시는 이 중 2개 코트를 피클볼 코트로 변경했다. 테니스 코트를 표시한 흰색 선 위에 노란색으로 피클볼 코트를 덧그린 것이다. 단 코트 중간의 네트는 이용자들이 직접 가져와 설치하도록 했다. 빈 코트를 맡기 위해 이날 7시가 되기 전 왔다는 카일리 로페즈는 “6개월 전 가족들과 함께 피클볼을 시작한 뒤 거의 매주 주말마다 이곳에 오고 있다”며 “원래는 8시에 와도 자리가 있었는데 점점 인기가 많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60년 된 피클볼, 코로나 계기 폭발적 대중화
최근 한국에서도 관심이 커지고 있는 피클볼은 테니스와 탁구, 배드민턴의 요소를 결합한 스포츠다. 배드민턴 코트와 같은 크기 코트에서 약 1m 높이의 네트를 가운데 두고 단식 혹은 복식으로 승부를 겨룬다. 게임 방식은 테니스와 비슷한데, 탁구처럼 11점을 먼저 내는 쪽이 이긴다. 네트 근처에서 발리(공이 바닥에 튀기기 전 상대 코트로 쳐서 넘기는 것)를 할 수 없는 것이 피클볼만의 특징이다.
피클볼은 1965년 미국 워싱턴주 베인브리지 아일랜드에서 함께 휴가를 즐기던 세 남자가 자녀들을 위해 고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만큼 어린아이나 초보자도 쉽게 익힐 수 있는 게 장점으로 꼽힌다.
피클볼은 50년 넘게 미국 북서부 지역의 중장년층을 중심으로 인기를 끌었으나, 팬데믹 때 야외에서 즐길 수 있는 안전한 운동으로 주목받으면서 대중화했다. 미국 스포츠·피트니스 산업협회는 2021년부터 지난해까지 3년 연속 피클볼을 ‘미국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스포츠’로 선정했다. 지난해 기준 미국 내 피클볼 인구는 480만 명으로 추산된다.
실리콘밸리에서도 최근 수년 새 피클볼을 즐기는 사람이 크게 늘었다. 미국 경제매체 비즈니스 인사이더는 “피클볼의 수요 급증은 기술 분야에서 특히 두드러졌다”고 분석하며, 그 이유로 △실리콘밸리의 전통적 인기 스포츠인 골프, 테니스 등보다 운동 능력이나 비용 측면에서 접근성이 뛰어나고 △격렬한 움직임을 필요로 하지 않아 네트워킹에 용이하다는 점을 짚었다.
그런데 이 전례 없는 인기가 최근 지역 사회에서 갈등의 불씨가 되고 있다. 일부 거주민들 사이 이른바 ‘피클볼 저항 운동’이 일면서다. 이 운동을 주도해 온 억만장자 부부는 “피클볼 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왜 피클볼 애호가들과의 전쟁에 나선 걸까.
▲“소음 때문에 못 살아” 억만장자의 한탄
여행 관련 예약 플랫폼 ‘핫와이어’를 창업한 실리콘밸리 테크거물 칼과 홀리 피터슨 부부가 피클볼 저항 운동의 전면에 선 것은 지난해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들은 지난 8월 “집 근처 프레시디오 월 공원의 ‘피클볼 팝(pop·소음)’ 때문에 거주 환경이 나빠지고 지역 명성이 위협받고 있다”며 시에 코트 운영 중단 청원을 냈다. 동시에 107세 된 자신들의 저택을 매물로 내놨다. 같은 고통에 시달려 온 이웃 수백 명이 이들을 지지하고 나섰다.
저택에서 17년 동안 거주해 온 피터슨 부부의 일상이 망가지기 시작한 것은 2022년 샌프란시스코시가 2개의 테니스 코트를 6개의 피클볼 코트로 바꾸면서부터라고 한다. 작년 11월 시 당국이 음향회사에 의뢰해 일주일 동안 소음을 측정한 결과, 이들의 주장은 사실에 가까운 것으로 나타났다. 저택의 옥상과 베란다 등에서 측정한 소음은 평소에는 40데시벨 정도로 유지됐으나, 피클볼 경기 때는 94데시벨까지 높아졌다. “94데시벨은 헤어드라이어 소음과 맞먹는 정도”라고 월스트리트저널은 전했다.
결국 시는 올해 초 6개의 피클볼 코트를 다시 테니스 전용 코트로 되돌리기로 하고 시 차원에서 설치했던 피클볼 네트를 제거했다. 대신 샌프란시스코 시내와 멀리 떨어진 다른 공원에 8개의 피클볼 코트를 설치하겠다는 계획을 내놨다. 이는 곧장 지역 ‘피클볼러(피클볼 애호가)’들의 반발을 불렀다. 이들은 “샌프란시스코시가 억만장자 몇 사람의 불평에 수백 명이 즐기는 코트를 없애려 한다”고 비난했고, “자체적으로 코트를 설치해 경기를 이어가겠다”라고 엄포를 놨다.
코트가 제거됐지만 경기는 계속되는 상태가 3개월 넘게 이어져온 가운데, 피터슨 부부의 저택이 2,900만 달러(약 400억 원)에 팔렸다는 소식이 지난 18일 샌프란시스코 지역 언론들의 보도로 알려졌다. 피클볼 소음 논란 탓에 처음에 내놨던 가격(3,600만 달러)보다 인하된 가격에 거래가 성사됐다고 한다.
▲갈등 없애려면... “코트-집 300m 떨어져야”
지역 사회에서는 피터슨 부부의 퇴장으로 시의 피클볼 코트 제거 계획도 취소될 가능성이 커졌다는 전망이 나온다. 그러나 팬데믹 이후 매달 평균 100개 이상의 피클볼 코트가 미국 전역에서 새로 생기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제2의 프레시디오 월 전쟁은 언제 어디서든 발발할 수 있다는 지적이 무성하다.
전문가들은 ‘신중한 도시 계획’이 이 문제의 해결책이 될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밥 우네티치 카네기멜론대 교수는 피클볼 소음이 사회적 갈등을 야기하게 된 것은 “피클볼 코트를 만들 때 소음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꼬집으며 “코트가 거주시설과 977피트(약 300m) 이상 떨어져 있으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비즈니스 인사이더에 말했다.
그러나 여기에도 한계가 있다. 피클볼 인기가 커질수록 넓은 부지를 찾기가 어려워진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미국에서는 ‘기술’로 소음 문제를 해결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미국 공식 피클볼 관리 기관 USA 피클볼은 음향 전문가와 함께 소음을 50% 이상 감소시키는 일명 ‘조용한 패들’을 개발 중이다.
●피클볼이란
피클볼은 테니스와 탁구, 배드민턴의 요소를 결합한 스포츠다. 배트민턴 코트와 같은 크기 코트에서 약 1m 높이의 네트를 가운데 두고 단식, 혹은 복식으로 승부를 겨룬다. 게임 방식은 테니스와 비슷한데, 탁 구처럼 11점을 먼저 내는 쪽이 이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