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내가 읽은 명작-약혼녀 <안톤 체호프 지음>

2024-04-02 (화) 문영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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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혼하고 집 나간 여인, 나쟈

내가 읽은 명작-약혼녀 <안톤 체호프 지음>
유럽에선 입센의 『인형의 집』 노라가 있었다면, 러시아엔 체호프의 『약혼녀』 나쟈가 있다. 이유는 다르지만 둘 다 집을 나간 서사를 담고 있다.

안톤 체호프(Anton Pavlovich Chekhov 1860~1904)는 남러시아 아조프해 항구 타가로그에서 식료 잡화상의 7남매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난다. 그가 15세에 아버지가 파산하여 이때부터 그의 글쓰기는 시작된다. 짧은 글을 써서 지방지에 팔며 고학한다. 19세엔 장학생으로 모스크바 의과 대학에 입학한다. 그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유머주간지에 사람들이 좋아하는 콩트나 재치 있는 짧은 단편을 써냈다. 생전에 510편의 소설을 썼는데 400편가량은 재미있는 유머 단편의 원동력이 되었다.

『약혼녀』를 읽으려면 당시 피폐했던 러시아의 배경을 좀 알아야 한다. 19세기 중반 러시아 인구 6,700만 명 중 5천만 명은 농민이었고 농민 중 4천만 명은 농노였다. 체호프의 할아버지도 돈을 모아 자유를 얻은 농노였다. 반면, 지주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일은 하지 않고 독서, 토론, 파티, 연애, 악기 등을 소일거리로 삼았다. 이들을 ‘잉여 인간’이라 불렀다.


주인공 나쟈도 이러한 시대에 몰락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할머니, 어머니와 단출하게 살며 열여섯 살 때부터 결혼을 생각해 온 평범한 시골 처녀다. 나이 스물셋에 잘 생기고 취미로 바이올린을 켜는 청년 안드레이와 약혼하고 결혼 날짜를 한 달 후로 정하고 있었다.

당시 집에는 할머니의 먼 친척인, 몸이 약해 요양차 매해 할머니를 방문하는 청년 사샤가 머물고 있었다. 그는 건축과를 졸업해 모스크바에서 일하고 있었다. 사샤는 “당신이나, 당신의 어머니나 할머니가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누군가 다른 사람이 당신들을 위해서 일하고 있다는 뜻임을 아셔야 합니다”라며 계속 놀고먹는 것은 비도덕적이며 악이라고 말한다. 그녀는 매해 듣는 그의 비판을 이번에는 전과 같이 흘려보내지 못하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과 공포를 느낀다.

집안은 결혼식 준비로 바쁠 때 나쟈는 신혼집을 보러 약혼자와 모스크바로 떠난다. 신혼집의 마루는 윤기 있게 반짝거리고, 이태리 가구에 피아노와 바이올린 걸개가 있었고, 욕실엔 손잡이를 돌리니 물이 쏟아졌고, 벽에는 금박 테두리를 한 비싼 유화가 걸려있었다. 약혼자 안드레이는 나쟈의 허리를 껴안은 채 방을 둘러보며 마냥 들떠 행복해한다. 그러나 그녀는 양심의 가책을 느꼈고 신혼집의 모든 살림이 천박하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허리를 감싼 약혼자의 손이 쇠뭉치같이 느낀다.

나쟈는 자신이 눈을 떴다고 생각하니 평소에 아름답다고 생각한 어머니가 불행한 사람으로 보이고 약혼자 안드레이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녀는 새로운 미래에 갈망을 확인하고, 사샤가 모스크바로 돌아갈 때 배웅하러 가는 척 따라나서 집을 떠난다. 일 년 후 그녀는 페테르부르크에서 방학이 되어 고향에 돌아와 있을 때 사샤가 결핵으로 죽었다는 전보를 받는다. 그때 그녀는 자기가 사샤가 원하는 대로 완전히 전환되어 있음을 확인하는 것으로 소설은 끝을 맺는다.

당시 톨스토이를 비롯해 모든 문인은 문학은 사회개혁의 무기이고 작가의 사상을 담는 것으로 생각했다. 반면 체호프는 주로 민중들 속에서 있는 생활을 그대로 그렸다. 체호프는 사샤의 입을 통해 말한다. “당신의 생활을 뒤집어엎으면 만사는 변합니다.” 자기가 길들어 온 삶, 특히 여성에겐 전통적인 결혼이라는 편안한 삶을 눈앞에 두고 막연한 운명을 향해 떠난다는 건 여간 큰 용기가 필요한 게 아니다. 『약혼녀』는 그의 유일한 혁명 의식을 엿볼 수 있는 작품으로 브나로드 운동(사회주의 농촌 계몽운동)을 암시하고 있다.

한 작품이 인생에 끼치는 영향은 지대하다. 책을 덮으며 궁금해진다. 이 소설을 읽고 많은 러시아 여성이 맹목적인 삶을 과감히 결별하고 자유를 찾았을까? 가출한 나쟈는 행복했을까?

『약혼녀』는 그가 장결핵으로 44세에 사망하기 전에 쓴 마지막 단편이 되었다. 단편집엔 『귀여운 여인』,『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골짜기』, 『6호실』,『상자 속에 든 사나이』 등 걸작 단편들이 실려있다. 읽어 보시기를 바란다.

내가 읽은 명작-약혼녀 <안톤 체호프 지음>

문영애
●수필가
●2021 제 14회 한국산문문학상 수상
●2024 제 12회 고원 문학상 수상
●2022 수필집 『지금 여기서 춤추며 살기』

<문영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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