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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층 우리집, 3층 임대, 지하 상가…실용에 감성을 더하다

2024-03-20 (수) 손효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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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년 이후 삶을 생각하며 여유 있게 시작했는데 어느덧 은퇴가 머지않은 나이가 됐어요. 여러모로 이 집은 새로운 무대로 느껴집니다.”

1·2층 우리집, 3층 임대, 지하 상가…실용에 감성을 더하다

회색 톤 시멘트 벽돌로 단정하게 꾸민 서울 성북동 주택. 경사진 땅의 형태를 활용해 다양한 기능을 담아냈다. [김재윤 건축사진작가 제공]

1·2층 우리집, 3층 임대, 지하 상가…실용에 감성을 더하다

크고 넓은 창을 통해 집 주변의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다이닝룸.


1·2층 우리집, 3층 임대, 지하 상가…실용에 감성을 더하다

다이닝 룸과 연결된 1층 거실. 현관과 2층 계단의 중간에 위치해 식구들이 하나둘 모여드는 공간이다.


'서울시 성북구 성북동'으로 시작하는 주소를 따라 막다른 골목까지 올라가면 단정하지만 어딘가 좀 생소한 건물이 나타난다. 보통 성북동 주택이라고 하면 높은 담장 너머 중후한 건물이 자리 잡고 넓은 잔디 마당이 펼쳐진 풍경을 떠올리지만 이 집은 안팎이 사뭇 다른 모습이다. 낮은 담장부터 벽돌 틈 사이로 살짝 들여다보이는 정원, 족히 4층은 돼 보이는 높이, 정면에 대문 대신 들어선 정체불명의 공간까지 주택인지 상가인지를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이 집에 사는 건축주가 정확히 의도한 바란다.

사립대학 교수인 건축주는 5년 전 성북동에 사는 지인을 만나러 갔다가 우연히 지금 집터를 만났다. 봄꽃이 흐드러지던 4월 말이었다. “땅은 운명이라고 하잖아요. 앞으로 살 곳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어요. 담 안쪽으로 단층집이 있었는데 고쳐 살 생각으로 내부를 보지도 않고 덜컥 계약부터 했죠. 나중에 보니 새로 짓는 것이 나은 상황이었어요."

얼떨결에 인생 계획에 없던 집 짓기가 시작됐다. 일단 집 짓기 과정 전반을 배우는 ‘건축주 대학'에 서 기초를 다지고 책과 영상을 섭렵하며 지식을 쌓았다. 수업으로 인연을 맺은 리슈 건축의 홍만식 소장이 설계를 맡으면서 본격적인 건축이 시작됐다. 설계를 거쳐 시공, 감리를 마칠 때까지 1년. 그렇게 4년의 담금질을 거쳐 집이 완성됐다. 지하 상가와 1, 2층 주거 공간, 3층 임대 공간을 차곡차곡 쌓아 올린 하이브리드 주택으로.


■주택 넘어선 '주거시스템' 만들기

설계의 가장 큰 이슈는 근린생활 공간, 가족의 주거 공간, 임대 공간의 공존이었다. 세 공간이 완전히 분리된 덩어리로 존재하게 할지, 한 건물 안에서 영역을 구분할지 등 여러 안을 놓고 고민한 건축가는 고저 차가 6m에 이르는 경사진 땅에서 방법을 찾았다. 경사지를 활용해 다른 성격의 공간을 층층이 쌓고 출입구를 별도로 배치한 것. 그리하여 골목과 면한 지하 공간에는 근린생활시설이, 마당을 품은 1, 2층에는 건축주 가족이 사는 주거 공간이, 다락이 들어선 3층에는 임대 가구가 자리 잡았다. 홍 소장은 “도로가 건물을 빙 둘러 가는 형태여서 각 공간마다 독립적인 출입 동선을 만들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1, 2층 주거 공간은 ‘ㄱ'자 형태로 마당을 품은 구조다. 마당을 앞에 두고 대지 안쪽으로 건물이 물러선 덕분에 외부에서 보면 위압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4층 높이가 한결 편안하게 다가온다.

“기분 좋은 거대함을 지향했다"는 건축가의 말대로다. 1층엔 다이닝룸과 거실을 나란히 배치하고 2층엔 안방과 서재, 기타 방을 만들어 층별로 기능을 나눴다. 1층은 벽 구분 없이 열린 느낌을 극대화한 공적 공간이고, 2층은 부부와 두 자녀까지 네 식구의 사생활이 존중받는 공간이다. “아파트 생활의 관성이 작용해서인지 1층에도 방을 만들어야 하는 것 아닌가 걱정이 앞섰죠. 1층을 완전히 비워 열어두고 층으로 구분하니 공간에 여유가 생겨 좋아요. 손님도 호스트도 얼마든지 편안하게 생활할 수 있거든요."

임대 주거 공간인 3층은 다락방 포함 4개의 방을 갖췄다. 30평대 아파트 규모에 단독 테라스도 있다. 지하에 자리 잡은 근린생활 시설은 골목과 접해 다양한 상공간으로 활용이 가능하다. “집에 대한 개념이 다양해지고 있잖아요. 마당 있는 주택 생활을 누리면서 임대 수익도 낼 수 있고, 남는 공간을 활용해 동네 주민들과 뭔가를 도모해볼 수 있는 집을 구상한 거죠. 제가 이 동네 특유의 분위기가 좋아서 정착했듯이 이 집도 동네 주민들이 편안하고 기분 좋게 생각할 수 있는 열린 공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삶을 채우는 '풍경' 도파민

주택에 다양한 기능이 요구되는 시대엔 경제적인 측면 이외의 중요한 부분이 집의 고유한 감성이다. 이 집에선 풍경이 그 역할을 한다. 홍 소장은 “골목 끝자락에 솟은 덕분에 동네 풍경과 한양 도성 성곽길까지 펼쳐지는 풍경이 압권"이라며 “가깝게는 잔디 마당을, 멀리는 오래된 도심 풍경을 다양한 프레임으로 즐길 수 있도록 계획했다"고 했다. 거실과 다이닝 공간뿐 아니라 욕실까지 통창으로 두르고, 테라스마다 벽돌담에 구멍 내어 쌓는 ‘영롱쌓기'로 벽을 세워 틈새를 열어놓은 것도 풍경을 끌어들이기 위한 장치다.


의도는 적중했다. 초반에는 사생활 문제로 외부로 열린 통창을 불편하게 여겼던 건축주가 가장 큰 만족감을 느끼는 요소가 차경. “아침은 거실 커튼을 여는 것으로 시작해요. 커튼이 열리면서 기대감이 마구 차오르다가 풍경이 온전히 펼쳐지는 순간 엄청난 감동이 밀려들죠. 눈이 오면 눈이 오는 대로 꽃이 피면 꽃이 피는 대로 매번 새롭고 충만해요. 도파민이 충전되는 느낌이랄까요. 중독이에요."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은 널찍한 주방과 욕실에서 보내는 시간이다. 요리가 취미인 건축주의 요청으로 주방은 가장 전망 좋은 곳에 자리를 잡고, 중앙엔 대형 아일랜드 작업대를 마련했다.

■정원과 서재를 가꾸는 생활

50대 중반에 집 짓기를 시작해 이제 예순을 바라보는 건축주는 “집을 매만지면서 자연스럽게 인생의 방향을 가다듬고 생활을 돌아본다"고 했다. 인생 2막의 밑그림을 그리기 위해 새하얀 도화지가 필요할 터인데 집이 그에게 그런 존재인 듯했다. 입주한 지 2년이 넘었지만 전문가의 손을 빌려 공간을 채우지 않은 이유기도 하다.

아직 집의 이름을 짓지 못했고, 3개나 되는 마당도, 은퇴 후 삶의 근거지가 될 지하 공간도 미완이다. 도화지 같은 공간에 다채로운 그림이 그려지는 사이 인생의 새로운 막도 불쑥불쑥 열릴 테다.

<손효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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