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진솔(眞率), 삶의 솔향기

2024-02-02 (금) 송윤정 금융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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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파이프에 너무 많은 양이 한꺼번에 흘러오면 관(管)이 막히고 만다. 더 심해지면 관이 터지고 말 것이다. 지금 내 상태가 그러하다.

올 1월부터 2년간 워싱턴 문인회의 회장직을 맡게 되었다. 이윤을 목적으로 하는 기업이나 어떤 뚜렷한 공동의 목적의식을 갖고 운영되는 큰 규모의 단체보다 이 단체를 이끄는 것이 더 어려워 보여 한사코 사양하려 했다. 글을 쓰는 사람들은 나를 비롯해 고집이 세기도 하고, 각자 글을 쓰는 이유도, 목적도, 방향도 제각각인 데다, 이 단체에는 연로하신 이민 1세대가 대부분이어서 봉사하고 싶은 마음이 있으나 체력이 안 되시는 분이 대다수이기 때문이다. 아무런 보수도 없이 애써 일해야 흠만 잡힐 이런 직책에 아무도 나서는 이가 없어 결국 내가 떠맡게 된 것이다.

작년 11월 말 총회에서 차기 회장으로 선출된 후, 이왕 피할 수 없는 일이니 열심히 해보자 생각했다. 가까스로 임원진을 갖추고, 2024년 한 해의 활동계획과 예산을 정하고, 재정을 정비하고, 월 소식지를 마련하고, 너무 엉성하게 만들어져 잘 사용되지 않는 웹사이트의 개선안을 찾고, 유튜브 채널 활성화를 모색하고, 초청 강연을 마련하고.. 그 와중에 회원들은 내게 전화해 이런저런 제안을 해왔다. 이런 부산함 속에 잠잠히 앉아 생각을 가다듬고 글쓸 여유가 없어, 새벽에 일어났다. 새벽의 고요에 덜거덕거리는 해야 할 일들을 잊고 글을 쓸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캄캄한 새벽, 작은 방에 불을 켜고 앉으니 적막함 속에 틱탁틱탁 움직이는 시계바늘 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아무래도 내 머릿속 관이 막힌 듯했다. 마감일이 코 앞인데 무얼 써야 할지 막막했다. 물에 빠져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ChatGPT에 물었다. “2월에 적합한 에세이 주제는?” 그러자 컴퓨터화면은 빠르게 채워지기 시작했다. “에세이 주제를 찾아보니, 다음과 같은 주제가 있습니다: 삶의 변화를 가져온 사람 또는 사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요?, 성공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인생에서 가장 큰 실수는 무엇인가요?...”

언어라는 것이 신비로운 힘이 있어, 컴퓨터가 마구 쏟아내는 단어들에 나는 답을 찾고 있었다. “최근에 내 삶의 변화를 가져온 사건은 문인회 회장직이지. 문인회 이야기를 쓸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건 가족이지. 2월엔 발렌타인데이도 있으니 가족의 사랑에 대해 쓸까? 성공의 의미? 곧 음력설도 있고 ‘청룡’의 해의 기원을 담는 글?...” 내친김에 ChatGPT에게 발렌타인데이를 주제로 에세이를 써보라 했다. 또다시 컴퓨터 커서가 바삐 움직이기 시작한다. “연인의 유혹: 발렌타인데이를 둘러싼 이야기”로 시작해 “이처럼, 발렌타인데이는 작은 선물 하나에도 큰 사랑의 이야기가 감춰져 있다. 사랑은 작은 순간에서 큰 의미를 발견하고, 작은 선물에서 큰 행복을 느낀다. 발렌타인데이는 이 작은 인간 드라마의 희로애락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특별한 날이다”로 결론을 맺는다.

또다시 ChatGPT에 갑진년, 음력설을 주제로 에세이를 써보라 했다. “갑진년, 새로운 시작의 문턱에서: 푸르게 피어나는 봄의 기운이 몸과 마음을 감싸는 갑진년”으로 시작해 봄의 꽃을 피우는 마음, 가족과의 만남, 새로운 나를 깨우는 마음으로 단락을 나누어 글을 쓴 후 “갑진년의 설, 새로운 시작을 음미하며 우리는 과거의 기억을 감사히 받아들이고 미래에 향한 열망을 담아보는 시간을 가집시다. 이 설, 새로움의 문이 열리고 희망의 꽃들이 만발하도록 마음을 열어봅시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로 마무리한다.

컴퓨터가 시계의 초침 소리보다 빠르게 써 내려간 이 글들을 읽자니 내 머릿속에 “진솔함”이라는 단어가 스쳐 갔다. 진실되고 솔직함, 그것만이 사람의 글이다. 그 순간, 지난 토요일 친구와 집 근처 그레이트폴스 공원에 갔을 때 보았던 소나무가 떠올랐다. 최근에 내린 눈과 비로 불어난 물살이 빠르게 흐르는 포토맥강을 따라 커다란 암벽이 장관을 이룬 곳, 그 한 가파른 암벽사이로 뿌리를 내리고 솟아 나온 작은 소나무였다. 향이 나나 싶어 가까이 다가가 코를 대어보았다. 너무 어려서인지 향은 없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솔향과 같은 글, 그것은 그 작은 소나무처럼 온 힘을 다해 암벽의 틈새를 뚫고 나오는 것과 같으리라.

아, 솔향 가득한 한국의 숲을 푸른 하늘을 우러러보며 거닐고 싶다.

<송윤정 금융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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