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미국인의 패배의식

2024-01-17 (수) 캐서린 램펠 워싱턴포스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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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이 승자인 시절은 끝났다. 오늘날의 미국인은 하나같이 패배자다.

최소한 우리는 스스로를 패배자로 여긴다. 최근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국인들은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그들이 속한 진영이 부당하게 패하거나 차별을 당한다고 믿는다.

유거브는 서베이 참여자들에게 지난 10년 사이에 미국이 좌측이나 우측으로 이동했다고 생각하는지 물었다. 응답자들의 반응은 양 갈래로 갈렸다.


응답자들 의견은 정치적 성향에 따라 뚜렷한 차이를 보였다. 대다수의 진보주의자들은 미국이 우측으로 움직였다고 주장한 반면 보수주의자들은 왼쪽으로 이동 중이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이 나라가 항상 자신이 원하는 방향과 정반대로 움직인다는 데에는 거의 의견이 일치했다. 좌우를 불문하고 이처럼 많은 미국인들이 자신이 지지하는 팀이나 정당이 뒤처지고 있다는 인식을 드러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퓨 리서치 센터는 지난 2022년 서베이 참가자들에게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이 승리보다 패배를 더 자주 한다고 생각하는지 물었다. 이에 대해 공화당계 응답자의 81%, 민주당계 응답자의 66%가 “그렇다”고 답했다. 하지만 미국의 주요 정당이 단 둘 뿐이니 이들의 응답은 산술적 측면에서 전혀 맞지 않는다.

미국 사회의 인종편견에 관해 묻는 설문조사에서도 이와 비슷한 결과가 나왔다. 예상했던 대로 주요 인종그룹 가운데 최소한 부분적으로나마 부당하게 차별을 당하고 있다는 반응은 흑인들 사이에서 가장 많았고, 아시아인과 백인들 역시 차별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견해를 밝혔다. (인종차별이 존재한다는 히스패닉과 흑인 응답자 비율은 거의 같았다.)

각 종교집단의 차별 인식도 유사한 패턴을 보였다. 이번 주 필자의 요청에 따라 유거브가 실시한 서베이에서 차별을 당한다는 반응은 유대교인들 사이에서 가장 높게 나왔다. 마찬가지로 기독교인들은 기독교 집단이, 무슬림은 이슬람 교인들이 종교로 인해 차별을 경험한다고 주장했다.

어떤 인종집단이나 종교단체가 실제로 겪는 ‘특혜’ 혹은 ‘차별’의 정도가 어떻건, 그 집단에 속한 사람들은 그들이 명백한 불이익을 당한다고 생각한다. 스스로를 사회적 서열의 아래쪽에 위치한 천덕꾸러기로 치부한다. 한때 이같은 세계관을 거부했던 그룹조차 지금은 ‘불만 문화’에 젖어있다.

레이건에 열광하는 공화당원들은 사회 일각에서 주장하는 구조적 불이익은 과장에 불과하고, 기회는 모두에게 충분하게 주어지며, 현재 고전 중인 미국인들은 자력으로 얼마든지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최근에도 보수주의자들은 진보주의자들이 누가 더 억압받는 위치에 있는지 경쟁하는 이른바 ‘억압 올림픽’에 열중하고 있다고 비아냥댔다.

그러나 “이길 수 없다면 합세하라”고 했던가? 과거 10년 동안 보수주의자들과 공화당은 그들만의 불만 문화를 키웠고, 공화당 정치인들은 유권자들이 정부기구, 혹은 ‘늪’이나 ‘?K 스테이트’와 같은 세력에 조직적으로 복속되었다는 주장을 펼쳤다.


공화당이 허울뿐인 승리를 지겨워한다는 사실을 꿰뚫어본 것이 도널드 트럼프의 가장 큰 정치적 통찰력이다. 백인 남성들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는 트럼프의 추종자들은 그들이 가부장적 사회구조와 인종주의의 최대 수혜자라는 지적에 넌덜머리를 낸다. 사실상 그들 또한 힘겨운 도전과 경제적 스트레스에 시달리기 때문에 승자라는 말도 듣기 싫어한다. 그들이 직면한 문제는 그들에게 불리하게끔 조작된 시스템 탓이기 때문에 이를 바로잡을 누군가를 선출해야 한다는 주장이 먹히는 이유다.

이는 유권자들을 움직이기에 더할 나위없는 전술이다. 그러나 이런 보편적 ‘눈송이 문화’에는 허점이 있다. (눈송이란 특권의식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경멸조로 지칭하는 은어다. 근성이 없고 화를 잘 내는 유리멘탈을 뜻하기도 한다.)

그중 하나는 상대적 이익을 볼 수 없게끔 눈을 가리고, 사고 기능마저 앗아간다는 점이다. (인색하기 짝이 없는 레이건식의 저소득층 지원을 비롯해) 어떤 식으로건 실존하는 구조적 불이익을 부정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상대적으로 잘 사는 사람들에게 “희망조차 가질 수 없을 만큼 어려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타인의 고통에 대한 이들의 공감능력을 제한할 뿐 아니라 잘 해보려는 의욕마저 무질러버린다.

이런 식의 수사는 부족한 공공자원을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사람보다 사실상 이를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에게 더 많이 나눠주는 행위를 합리화한다. 양당 모두 부유층 퍼주기에 골몰하는 이유일 수 있다. (예를 들어 소득 상위권 5%에 속한 사람들을 위해 세금인상 방어막을 쳐주고, 그보다 더 부유한 사람들의 세금을 감면해주거나 예일 법대를 갓 졸업한 학생들에게까지 학비대출금을 탕감해주려 한다.)

만일 모두가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혹은 문화적으로? 패자라면 너나없이 더 큰 파이를 가질 자격이 있다. 그러나 파이를 그런 식으로 나눌 순 없다. 이들 모두에게 “당신이야말로 진정한 약자”라고 말하는 것의 다른 위험은 이들로 하여금 불량하게 행동하도록 만드는 도덕적 면허증을 제공한다는 점이다. 그저 불량하기만 한 게 아니다. 때론 폭력적이기까지 하다. 만약 상대방이 이미 똑같은 짓을 하고 있다면 당신 역시 거짓말을 하고, 속이고, 훔치고, 민주주의를 파괴해가며 당신의 적으로 간주되는 사람들을 향해 공권력을 무기처럼 휘두르지 못할 이유가 무언가? 이처럼 굴절된 시각으로 보면 당신은 그저 “저들과 동등하게” 행동하고 있을 뿐이다.

만약 양 진영 모두가 이런 생각을 갖고 있고, 정치인들이 계속 유독한 환상을 부추긴다면 부작용의 위험수위는 급상승하게 된다. 또 한번의 선거를 향해 나아가는 길목에서 보다 신선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지도자의 자리는 여전히 비어있다. 이제 미국인들은 사실이 그렇듯 더욱 더 승자처럼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 빈자리를 채워줄 그가 전해야할 메시지다.

캐서린 램펠은 주로 공공정책, 이민과 정치적인 이슈를 다루는 워싱턴포스트지의 오피니언 칼럼니스트이다. 자료에 기반한 저널리즘을 강조하는 램펠은 프린스턴대학을 졸업한 후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로 활동한 바 있다.

<캐서린 램펠 워싱턴포스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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