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망각

2024-01-12 (금) 그레이스 송 스페이스 상담센터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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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한두 가지쯤 잊고 싶은 기억이나 혹은 꼭 간직하고 싶은 기억이 있을 것이다.

상담을 찾는 내담자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떤 이들은 잊으려고 해도 잊히지 않는 기억으로 힘든 자신을 위해, 어떤 이들은 자신이나 가족의 점차 잃어가는 기억으로 인해 상담센터를 찾는 상반된 두 경우를 대할 때 그런 생각이 든다.

상담에서 불안·우울을 가지고 찾아오는 내담자에게 실존적 접근법으로 “현재를 살라, 지금 자신의 오감을 충분히 느끼라”는 명상을 강조하는 경우가 있다.


나의 자매들은 기억을 점차 잃어가는 엄마를 보면서 한동안 많이 안타까워하고 마음아파하기도 했다. 하지만 곧 96세가 되는 나의 노모는 지금, 현재를 너무나 충실하게 살고 있다. 자라면서 엄마를 힘들게 하고 많이 부딪혔던 나에 대한 기억도 잊은 채, 지금의 내 모습을 예쁘다고 말해주고 뒤돌아서면 언제 다녀갔는지도 잊으면서 나와 만나는 그 시간, 그 순간을 흠뻑 즐거워하는 엄마는 정말로 현재를 잘 살아내고 있는 한 사람임이 분명하다.

내 어릴 적 기억에 엄마와 아빠가 싸워 나를 불안에 떨고 울게 한 경우도 가끔 있었음에도, 엄마는 67세 때 자신을 혼자 두고 일찍 돌아가신 남편에 대해 좋은 기억만을 간직하고 있다. 엄하고 가부장적이어서 엄마를 비롯하여 우리 자매 모두를 긴장하게 만들었던 아빠의 모습은 저 뒤로 하고, 무뚝뚝하면서도 책임감이 강했던 가장의 모습만을 기억에 남겨두고 있는 엄마를 보면 망각이라는 것은, 동시에 기억이라는 말과 공존함을 새삼 느낀다.

그 오랜 세월의 많은 기억을 잃어가고 있는 엄마를 보는 가족들은 안타까운 마음이지만, 현재의 순간순간을 평온한 시간들로 맞이하면서 지난 세월의 좋은 기억만을 간직하고 있는 엄마를 보면 뭐라 말할 수 없는 아련함이 밀려오면서 내담자들이 떠오른다.

어린 시절부터 장년이 될 때까지 가정폭력의 경험으로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가진 30대 내담자는 너무나 생생한 과거의 기억에 일상생활과 직장에서 어려움을 호소하며 상담을 의뢰했다.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란 사람이 심각한 부정적인 사건을 경험한 후, 신체적/정신적 증상을 나타내는 질환의 하나이다.

콜롬비아 대학 치매연구센터장이며, 정신과 교수인 스콧 A. 스몰은 망각과 기억에 대한 연구로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와 기억간의 관계, 또 망각의 이점에 대해 설명하면서 도움이 되지 않는 기억을 없애는 과정을 돕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말하였다. 그는 너무 고통스러운 기억이 되살아나서 자신의 에너지를 소진시키려고 불을 지피기 전에 사회적인 관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사랑, 우정 등을 추구하는 삶을 만들어갈 것을 제안한다. 사회적 상호작용이 너무 많은 정서적 기억을 저장하는 뇌 부분을 진정시켜서 다시 부정적인 감정·에너지의 점화를 억제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삶에 참여하는 것과 함께 뇌가 적극적으로 잊어버리도록 돕는 또 다른 방법은 분노, 원한, 과거의 실망을 버리겠다는 의식적인 결정을 내리는 것이다. 우리가 상처받은 기억에 더 많이 머물거나, 기억을 둘러싼 사건을 곰곰이 생각할수록 기억 주변의 신경 연결은 더 강해져서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치료를 방해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적극적인 사회적 관계와 삶의 참여가 망각과 또 긍정적인 기억에 효과적인 역할을 한다니 2024년 새해결심에 이 한 가지를 더 추가하여 오늘부터라도 가족, 이웃, 친지와 한번 더 인사를 나누고 만남을 즐겨보는 건 어떨까 한다.

<그레이스 송 스페이스 상담센터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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