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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인 칼럼 장준식 목사/세화교회

2023-09-21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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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생 제사와 사랑

이름이 주는 선입견이 있습니다. 구약성경의 이름은 원래 각 책의 히브리어 첫 글자를 따서 지어졌습니다. 예를 들어, 민수기는 히브리어 ‘베미드마’로 시작합니다. 한국말로 ‘광야에서’라는 뜻입니다. 민수기는 ‘광야에서’ 발생한 일들에 대한 기록입니다. 레위기는 히브리어 ‘바이크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부르셨다’는 뜻입니다. 레위기는 ‘부르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민수기라는 이름은 특정한 사건을 지칭하는 인상을 주지만, ‘광야에서’는 뭔가 기대를 갖게 합니다. 광야에서 무슨 일이 있었을까? 실제로 민수기에서 우리는 광야에서 발생한 다양한 사건을 만납니다. 아주 흥미진진합니다. 레위기는 ‘레위지파의 기록’이라는 인상을 주지만, ‘그리고 하나님께서 부르셨다’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온갖 지루한 법으로 채워진 것 같지만, 실은, 레위기는 ‘부르심’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알면 호기심이 생깁니다.

레위기는 제사를 둘러싼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제사의 종류와 방법, 제사를 집전하는 제사장들에 관한 규칙들, 그리고 제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상태에 대한 이야기들이 레위기를 메우고 있습니다. 창세기부터 성경을 읽어 나가다가 처음으로 막히는 곳이 레위기입니다. 너무 낯선 풍경을 접하기 때문입니다. 현재 우리의 삶과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들로 가득 찬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제사의 종류나 방법을 기억하는 사람조차 없습니다. 사실 기억할 필요가 없습니다. 레위기에 나와 있는 것처럼 제사 드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구약의 예언서에 보면 선지자들은 모두 제사를 비판적으로 기술합니다. 아모스, 호세아 같은 선지자들의 제사 비판은 신랄합니다. 그렇다 보니, 우리에게 비춰진 제사는 그렇게 좋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왜 성경은 희생제사에 대한 기록을 이렇게 정성스럽게 해 놓은 것일까요? 희생제사는 도대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새크라멘트. 성례전. 이것은 보이지 않는 사랑을 보이게 끔 하는 거룩한 장치입니다. 기독교의 사랑은 숨은 사랑이 아니라 ‘보이는’ 사랑입니다. 요한은 말합니다.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세요!”(요일 3:18). 희생제사는 사랑의 새크라멘트입니다. 희생제사는 사랑이 드러나는 장치입니다. 레위기에 기록된 희생제사에 쓰이는 제물들은 그 당시 농부와 유목민들의 생계였습니다. 가축이나 곡식, 열매는 생명과 직결되는 것들입니다. 그것을 희생제물로 바치는 자들은 자신이 바치는 제물을 사랑했습니다. 희생제물은 사랑입니다. 희생제물을 바치는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제물로 바치면서 하나님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드러내 보이는 겁니다. 곧, 희생제물은 사랑입니다. 여기서 제물을 빼고 다시 진술하면, 희생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희생입니다. 희생은 주는 것, 헌신, 내어줌, 나눔이라는 말로 바꾸어 표현할 수 있습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는 희생이 있습니다.

우리 시대는 희생이 줄어든 사회입니다. 다른 말로, 사랑이 줄어든 사회입니다. 희생제사는 히브리어 ‘코르반’과 ‘레하크리브’가 합쳐 생긴 말인데, ‘가까이 다가오다’, ‘친밀한 관계를 회복한다’는 뜻입니다. 희생은 관계를 굳세게 만드는 가장 좋은 접착제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경험하는 우리 시대는 희생이 희귀한 사회가 되었습니다. 모두 자기 것을 챙기느라 남을 희생시키지, 자기를 내어주어 다른 이들의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희생을 찾아보기 힘든 사회입니다. 희생이 없다 보니, 서로의 관계가 가까워지지 못하고 멀기만 합니다. 이런 시대에 레위기의 희생제사를 묵상하는 일은 그 어느 때보다 소중합니다. 희생(헌신, 내어줌, 나눔)을 통해, 사랑받고 사랑하는, 따뜻함에 삶이 스며들게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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