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글에서 잊을만 하면, 버린 과거 사진을 스마트폰으로 보내준다. 스마트해서 좋은 부분도 있지만, 쓸데없이 너무 스마트해서 성가시다. 불과 몇 년 새 우리 신도들도 모두 스마트폰을 갖게 됐다.
그 스마트폰으로 인해 좀 더 스마트해졌는진 모르겠고, 좀 달라진게 있다면, 동영상으로 스님들 법문을 보고 와서 묻는 이가 생겼단 거다. 법문을 듣는 건 다행이지만, 다 좋기만 한 것은 세상에 없어서, 부작용이 있다. 가령, 어떤 스님은 윤회가 없다 하시고, 어떤 스님은 있다 하시고, 어떤 스님은 기도가 제일이라고 하시고, 어떤 스님은 필요 없다 하시고, 어떤 스님은 마음 밖에 없다 하시고...등등, 다 다르게 말씀들을 하셔서 뭐가 '맞는' 건지 모르겠단 것이다.
일단 이런 질문을 받으면 웃을 수밖에 없다. 마치 '사과를 왜 노랗다고 하느냐'는 말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눈치채셨는가. 안다는 생각이 늘 문제다. 일단 마음에 대해서 얘기해보자면, 부처님께서는 마음이 있다고도 없다고도 안 하셨다. 마음은 '찰나생 찰나멸' 이라고 정확히 말씀하셨다.
그래서 있다, 없다로 답할 문제가 아니라고도 하셨다. 아는 사람은 이미, 이게 무슨 소린줄 안다. 하지만 모르는 이는, 말장난 하나 ? 속으로 그럴 수 있다. 어떻게든 중생을 가르쳐야 하는데, 마음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고...라고 하면, 헷갈릴 게 당연하다. 그래서 없다든 있다든, 궁극은 같으나, 없다고 일단 가르친다. 없다,를 중생계의 헤아림으로, 물건이 있다가 없어진 것처럼 이해를 하게 되면, 없다니 ? 여기 있는데 ? 하고 바로 의문을 품게 된다.
좀 더 공부하기 쉽게 되는 것이다. 반대로 있다,라고 할 수도 있다. '일체유심조' 처럼 마음이 다 한다고 가르칠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걸 마음이 다 하는 건 맞지만, 마음이 다란 얘기는 또 아니다. '마음'은 어차피 개념이다. 사과를 사과라 부르는 것과 같다. 그러나 늘 말하지만 세상에 당신이 알고 있는 그 사과는 없다. 진짜, 사과는 개념이다. 부연하자면, 기도가 필요 없다,를 자신의 생각인 '필요'로 알아듣게 되면, 이 법문은 전혀 다른 법이 된다.
개인적으로 동영상 법문을 듣진 않지만, 어떤 스님이 유투브 같은데 나오셔서 법문을 하실 정도면, 그분 스스로 법에 대한 한 통이 있으시기 때문에 나오신 거라고, 이 중은 믿는다. 일반인도 아니고, 법을 전하는 스님이, 감히 틀린 법문을 공개적으로 그렇게, 용감하게 할 수는 없을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대고, 아직 공부하는 입장에서 옳고 그름에 대해 판단하려고 시도 하는 건 아니라고 본다. 옳으냐, 그르냐 판단이 안된다는 건, 이미 모른다는 말과 같다. 즉, 시비를 가리지 못하면 모르는 거다.
본인이 맘에 든다면 그냥 들으면 된다. 열심히 듣다보면, 귀가 열리는 날이 온다. 기도 뿐이라고 어떤 스님이 말씀을 하시면, 시비 없이 해보는 거다. 옳은지 그른지 행으로 증명하면 된다. 내가 강원도 언어를 모르면, 강원도 사람 대화를 어차피 이해 못한다. 강원도에 관심 있으면 강원도 말을 열심히 익히면 된다. 강원도 말이 표준어는 아닐지언정 틀린, 것은 아닌것 처럼, 법문이 다 다른 건, 틀린 게 아니라, 미처 본인이 그 언어의 뜻을 모르는 것이다.
마음은 '찰나생 찰나멸' 이다, 라고 바른 법을 설해도, 듣는 이들은 각자가 자기 생각 대로 듣는다. 어쨌든 마음은 없다라거나, 혹은 마음 뿐이다라거나, 윤회, 기도, 등등은 부처님 법 전체를 말하는 게 아니다. 세상엔 강원도 말만 있는 게 아닌 것이다. 팔만사천 경전이 있다. 그러니, 법문을 듣고 어떤 게 옳은지 판단하려 하기 이전에, 그분들이 모두 다 부처님 말씀을 전하고 있단 걸 일단 믿기 바란다.
공부가 우선이다. 프락티스, 부처님이 강조하고, 또 하신 말씀이다. 들어서 행복해진다면 듣고 해보는 거다. 아니면, 아예 듣지 않으면 된다. 들어, 도움은 안되고 의문만 증폭된다면, 그 무슨 시간 낭비냐. 스마트폰을 스마트하게 쓰지 못하는 거다. 사족을 달자면, 사과는 없다. 그러나 당신이 사과를 있다고 믿는다면, 당신에게 그 사과는 있다. 이 세상엔 80억의 사과가 있다. 그 사과는 다 옳기도 하고, 다 그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