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연(佛緣)
▶ 정태수 / 본보 객원편집위원
동쪽으로 허리굽혀 두손을 뻗으면 백련사를 품은 강진 만덕산이 손에 닿을 듯, 남서쪽으로 달리다 훌쩍 뛰면 대흥사를 안은 해남 두륜산 등짝이나 엉덩짝이 발이 밟힐 듯, 내가 낳고 자란 시골마을은 그런 곳에 똬리를 틀었다. 뿐인가. TV나 라디오는 고사하고 벽걸이 시계조차 귀했던 우리마을 아침은 늘 옆마을 뒷산 봉덕사 할매스님이 쳐주는 새벽 종소리에 맞춰 시작됐고 낮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탁발승이 제 목탁에 맞춰 염불을 하며 가가호호 방문해 음성공양을 해주었다. 어머니나 누나를 대신해 보리쌀을 퍼주는 어린 내게 공손히 절을 하고 돌아서던 삼촌 같고 큰형 같은 스님의 진지한 표정이 아직도 생생하다.
얼굴 가득 깊은 주름이 패이고 한쪽 어깨가 처지고 허리가 약간 굽은 봉덕사 할매스님에게 동네어른들이 늘 공손하게 대하는 것이 다소 신기하기는 했지만 불교와 미신을 구분하지 못할 정도였던 나는 불교에 그 어떤 호감도 갖지 못했다. 그랬으니 중1 때 어떤 일로 우리집에 자주 들렀던, 어느 도회지 보살님이 (초등학교 수학여행 때도 못가본) 대흥사에 데려가 이틀인가 사흘인가 먹여주고 재워주는 ‘특전’을 베풀었어도 나는 감사한 마음보다 한시바삐 도망치고픈 마음에 그 맛있는 절밥조차 깨작깨작 맛없게 먹었다. 나중에 들으니 그 보살님은 나를 불자로 만든 뒤 힉업 뒷바라지를 해줄 생각이었다는데 내가 그 모양이라 포기했다 한다.
또 몇년이 흘러 80년대. 광주의 소용돌이 속에 친구와 후배가 숨지고 내 또래 대학생들이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등졌다는 뉴스가 무시로 나를 흔드는 가운데 그 보살님이 수원 어딘가에 큰 절을 차렸다는 소식이 들려왔어도, 격랑의 80년대 중반에 만난 평생도반이 배냇불자라 할 정도였어도, 서른 중반에 처음 장만한 인왕산 자락 허름한 내집을 둘러싼 세 집이 죄다 절 아니면 탱화 장인의 도량이었음에도, 전혀 변함이 없었던 부처님 세상에 대한 나의 냉소적 무관심이 기독교의 땅 미국에 와서 비로소 깨지고 장대비가 억수로 쏟아지던 2005년 봄 어느날 나는 엉금엉금 기다시피 차를 몰고 카멜 삼보사를 찾아가 무릎을 꿇게 됐다. 바로 그 며칠 전 축구장에서 쓰러져 끝내 일어나지 못한 팀메이트의 허무한 죽음이 내게 삶과 죽응에 대한 ‘전에 없던 한생각’을 일으킨 것이다. 그것이 계기가 돼 나는 부처님 새세상에 실눈이나마 뜨게 되고 내가 몸담은 SF한국일보는 북가주에 교회/성당 320여곳에 절은 10곳도 안될 정도였음에도 우리말로 발행되는 종합일간지 중 세계최초로 주1회 불교면을 허락해주고 내게 그 면을 위해 봉사할 기회를 준 덕분에 나는 만 17년 다 되도록 부처님법 공부에 나름 공을 들이는 시늉이나마 해오고 있다. 나날이 감사할 일이다. 마땅히 그리고 기꺼이 보은할 일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