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러시아에서 바그너 용병 그룹의 무장반란이 발생하자 23년 넘게 러시아를 지배해왔던 푸틴의 철권통치가 타격을 받을 수 있다는 서방세계의 관측이 우세했다. 하지만 무장 반란이 끝난 지 한 달여가 지난 현재까지도 푸틴의 권력기반은 흔들림 없이 여전히 견고해 보인다. 푸틴에 대한 러시아 국민들의 지지도는 변함없이 80%를 웃돌고 있다. 무장반란으로 정권의 취약성이 드러났음에도 푸틴을 대체할 만한 지도자는 아직 없다는 것이 러시아 국민 대다수의 굳은 믿음인 것 같다.
푸틴이 이처럼 러시아 국민들의 의식 속에 지도자로서 확고하고 자리 잡을 수 있도록 해준 것은 과거의 강한 러시아를 재건하겠다는 정치적 프로파간다였다. 푸틴은 집권 기간 내내 올림픽이나 월드컵 같은 메가 스포츠 이벤트 유치를 통해 ‘러시아의 영광’을 외쳤다. 지난 2014년 크림반도 침공에 이은 우크라이나 침공 역시 이런 정치적 프로파간다를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러시아 국민들은 실제로 소련 붕괴 이후 혼란에 빠졌던 나라가 푸틴이 집권하면서 안정을 찾았고 그가 20년 넘게 집권하는 동안 러시아가 발전했고 군사력도 나름 강화됐다고 여긴다. 그러면서 강한 러시아를 만들고 이끌 지도자는 오로지 푸틴 밖에 없다는 관념이 러시아 국민들의 뇌리에 깊숙이 박히게 된 것이다. 여기에 관제 언론들이 한몫했음은 물론이다.
한 나라 국민의 의식은 역사적 경험에 의해 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현 러시아 국민들의 의식에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역사적 경험은 볼셰비키 혁명 이후 70년 넘게 이어진 전체주의적 지배였다. 이 시기를 거치면서 러시아 사람들은 절대적인 권력에 의한 지배에 길들여지고 익숙해졌다.
그리고 이런 의식은 구체제가 붕괴되고 러시아라는 새로운 나라의 등장 이후에도 달라지지 않았다. 21세기에 들어서도 많은 러시아 사람들은 소비에트 시절의 향수에 사로잡혀 있다. 이것을 러시아의 사회학자인 알렉산드로 지노브예프는 “러시아 사람들의 의식 속에는 ‘소비에트 인간’(Homo Sovieticus)의 DNA가 자리 잡고 있는 것 같다”라고 표현한다.
한국으로 귀화해 현재 수원대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는 러시아 출신 벨랴코프 일리야 교수가 들려주는 얘기도 마찬가지다. 그에 따르면 서방에서는 개혁과 개방의 지도자로 높은 평가를 받는 고르바초프가 러시아 국민들 사이에서는 최악의 인물로 꼽힌다는 것이다. 잘 나가던 나라를 무너뜨리고 시궁창으로 빠뜨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러시아 국민들을 대상으로 가장 훌륭했던 지도자를 묻는 설문조사를 실시하면 어김없이 스탈린이 1위를 차지한다. 우리에게는 무자비한 피의 독재자로 인식돼 있는 스탈린이 러시아 국민들에게는 러시아의 위대함을 이끌었던 지도자로 각인돼 있는 것이다. 특히 러시아가 정치적·경제적으로 불안정하거나 어려운 시기일수록 더욱 그렇다.
스탈린 시절을 그리워하는 러시아 국민들의 강한 정서는 강력한 정치적 존재에 대한 러시아인들의 갈망을 보여준다. 실질적인 민주주의와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푸틴 체제를 왜 러시아 사람들이 적극 지지하거나 묵인하는지를 설명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주어진 자유를 제대로 향유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자유가 국가와 사회 전체의, 그리고 각 개개인의 내재적인 가치로 자리 잡기까지는 시행착오와 혼란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그리고 많은 경우 이런 혼란을 견뎌내지 못한 채 자유를 절대 권력에 양도하는 우를 범하게 된다.
이는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이 자신의 책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통해 아주 설득력 있게 제시했던 담론이다. 인간은 감당하기 어려운 자유가 주어지게 되면 이를 버거워하면서 오히려 구속과 타인에 의한 지배를 원한다. 자유는 인간에게 독립과 합리성을 부여하지만 동시에 불안에 싸인 존재로 만들기도 한다. 이럴 경우 시민들은 기꺼이 ‘진짜 자유’를 독재 권력이 약속하는 ‘가짜 안전’과 맞바꾸게 되는 것이다. 1930년대 히틀러와 나치즘은 독일 국민들의 이런 ‘어리석은 거래’를 통해 역사에 등장할 수 있었다.
국가주의와 전체주의를 이데올로기로 하는 구체제 아래서 비록 개인의 자유는 억압받았을지라도 사회는 그다지 시끄럽지 않았다는 기억을 갖고 있는 기성세대가 물리적으로 소거되지 않는 한 푸틴의 일인 독재체제는 계속 유지될 가능성이 높다. 구체제 붕괴로 혼란스러웠던 러시아에서 푸틴의 등장을 가능케 해 준 것은 억압적이었던 옛날이 더 좋았다는 퇴행적 회고 정서였다.
지노브예프가 지적한 것처럼 역사적 경험을 통해 국민의식 속에 형성된 DNA의 생명력은 끈질기다. 일부 한국인들의 의식 속에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는 가부장적 독재 권력에 대한 향수가 21세기 한국의 현실정치에서까지 여전히 힘을 행사하고 있는 데서도 그것을 확인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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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성 논설위원>